게일 해리슨 로먼과 버지니아 헤이글스타인 마쿼트가 엮은 <아방가르드 프런티어>(차지원 옮김, 그린비, 2017)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라고 명명되는 일련의 예술적 경향과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서구 예술가들 사이의 접촉점과 유사성을 비교, 분석한 책이다. ‘러시아와 서구의 만남’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새로운 삶과 예술적 태도로써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서구의 문화와 예술에 스며들어 그를 추동하고 견인함으로써, 어느덧 서구 문화의 첨단에 서게 되는 장면들을 집어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서평으로서가 아니라, 이 책의 아이디어에 기대어 동아시아의 한 사례로,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과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만남을 덧붙이고자 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번역자 차지원의 말처럼 “그것이 존재했던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공을 넘어 유럽으로 신대륙으로 그리고 20세기의 시간 전체로 퍼져나가” 동아시아로, 일본을 매개해 식민지 조선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돌아온 무라야마 토모요시가 첨단의 예술을 하겠다고 선언하며 독일 표현주의와 러시아 구축주의가 혼재된 단체 마보(MAVO)를 만들었다면, 식민지 조선에서 러시아 구축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화된 경우로 김용준의 평론을 들 수 있다. 도쿄미술학교 재학 시절 김용준은 프롤레타리아예술의 두 종류로 독일 표현주의와 러시아 구축주의(당시의 번역어로는 구성파)를 제시했는데(1927), 도쿄 유학 시절 그가 표현주의나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가능성은 매우 컸다.
김복진 디자인, <문예운동>창간호 표지, 1926.2.
무라야마 토모요시 디자인, 삼과회 전람회 포스터 <극장 삼과>, 1925.5.
당시 김용준이 자신의 사상적 관점에 따라 다다이즘과 표현주의에 손을 들었다면, 「나형 선언 초안」(1927)을 발표하면서 순정 미술이 아닌 비판 미술을 주장했던 김복진은 구축주의에 좀 더 가까웠던 경우이다. 물론 김복진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일본의 신흥미술 단체 마보와 산카(三科)는 카프의 전신 파스큘라의 결성과 초창기 카프의 예술적 지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복진의 초기 작업에서 다다이즘과 구축주의가 혼재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마보와 산카의 회원들이 다다이즘, 미래파, 표현주의, 구축주의 등 다양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복진이 작업한 <문예운동>창간호의 표지는 러시아 구축주의의 영향이 드러나는 작업으로 꼽힌다. 추상화된 도형의 배열, 화살표의 배치 등에서 무라야마 토모요시가 디자인한 <극장 삼과> 포스터의 구축주의적 형태와 유사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김용철, 2021) 재현이 아니라 순수한 형태의 구성과 기하학적 추상의 양식에 주목했던 러시아 구축주의의 영향이 김복진의 작업에서 확인되는 부분이다.
마보에는 베를린에서 다다이즘과 러시아 구축주의를 동시에 접촉했던 무라야마 토모요시를 비롯해, 바우하우스를 통해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접촉한 여러 작가가 포진하고 있었다. 마이클 헤이스는 베를린의 다다이스트들이 타틀린의 기계 예술(Machine Art)에 대해 특별한 해석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은 타틀린이 기계 예술을 통해 ‘모든 물질이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음을 발견했다고 보았다. 나무, 유리, 종이, 금속 시트, 철나사, 못, 전기도구, 표면에 뿌려진 유리 섬유, 부분의 움직일 수 있는 능력 등,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예술 언어의 정당한 도구들로 선언되었다.’(193) 그리하여 베를린 다다는 일상 물질의 사용을 통해 몽타주 테크닉을 강화했지만, 러시아 구축주의에 대한 미학적 부정이 러시아의 새로운 사회 재건과 동일시되었다는 사실은 간과했다.(195)
<마보>3권의 표지, 1924.9.
<마보>3권의 표지는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의 타틀리니즘(Tatlinism) 해석으로부터 고안된 것으로 추측된다. 표지 오른쪽 아래에는 다카미자와의 <라시아멘(러시아인?)의 형상>이라는 작품이 실려 있는데, 회화처럼 보이는 이것은 실은 콜라주이다. 파란색 칸 왼쪽 위에 보이는 두 개의 끈은 실제 화약을 붙여 놓은 것이며, 오른쪽의 검은색 긴 선들은 모발이었다. 물론 마보 측에서는 이 화약이 이미 사용된 것으로 터지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폭발물이 잡지 표지에 붙은 상태로 발매되었기 때문에 마보 3권은 발매 당일 모두 압수당하게 된다. 이러한 마보의 작업은 기존의 가치에 대한 부정과 해체라는 차원에서 ‘부정과 파괴의 몽타주’를 추구했던 베를린 다다의 작업과 유사하다.
1930년대 카프 미술계에서 활동했던 이상춘의 초기 작품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향이 발견된다. 신고송은 이상춘의 초기작 중 얼굴 절반이 잘린 여성의 누드에 밥그릇 뚜껑과 여자의 모발을 붙인 다다적 작품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상춘의 경우는 스승이기도 했던 김용준과 달리 다다이즘과 표현주의로부터 구축주의로 나아간 사례를 보여준다.
그가 기획한 미술 전람회의 명칭이 공과전(○科展)인 점도 흥미롭다. 신고송은 공과회라는 명칭이 산카로부터 온 것이라고 기록했다. 산카(三科)는 일본 정부가 주도했던 문부성 미술전람회 일과(一科)와 이에 반기를 든 이과회(二科會) 모두를 거부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공과(○科)는 산카와 같이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공과회의 명칭이 삼과회로부터 왔다는 연관성 이전에, 이상춘이 제시한 숫자 0에서 “완전한 비구상적 형태, 새로운 무형상적 세계의 영점, 더욱 높은 직관의 세계”, 형태의 영(zero of form)을 추구했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0.10: 최후의 미래주의자 회화 전시회>를 떠올리게 된다. 여러 차례 개최된 공과회의 전시회에서 절대주의적 관점은 표면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춘의 0(공)과 말레비치의 0(제로)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은 일본이라는 매개를 통해 식민지 조선이 조우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흔적일 수 있다.
이상춘 디자인, <연극운동>1권 2호 표지, 1932.7.
Kolonne links의 공연 사진, 1927~1932년 추정.
이상춘은 여러 잡지의 표지를 디자인했는데, 그 중 <연극운동>1권 2호의 표지는 잡지의 제호에 사진을 덧붙인 전형적인 포토몽타주 기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것은 베를린 다다보다는 엘 리시츠키가 시도했던 작업에 가깝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는 예술이 삶의 재건을 표현하고, 대중과 연계하며, 이미지를 통해 집단과 기술의 화해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210) 그리하여 시각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다다적 스타일 대신, 사실적이고 재현적인 이미지를 삽입함으로써 혁명 이후 새로운 대중에 다가가려는 테크닉이 시도되었다. 리시츠키도 새로운 관객과의 관계 변화에 따라 형태적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다의 파괴적 매커니즘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정보를 통해 예술의 교육적 쓰임새를 보여주는 것이었다.(213) 그런 면에서 연극운동의 표지는 네프 이후 지시된 예술적 실천의 리시츠키식 수용과 닮아있다.
전형적인 포토몽타주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이 표지에는 독일의 아지프로 극단 콜로네 링스(Kolonne links)의 공연 사진(오른쪽)이 여러 장 겹쳐 디자인되어 있다.(이민영, 2018) 콜로네 링스는 1927년 러시아의 아지프로 극단 푸른 작업복(Blaue Blusen)의 독일 순회공연 이후 만들어진 단체로 연기, 의상, 소도구, 무대장치 등 공연 전반에서 자연주의적 색체를 배제한 극단이었다.(박광수, 1991) 사진 속 장면은 슈프레히콜 공연으로 보이는데, 이는 노동자의 육성을 관객에게 직접 전달하기 위해 간단한 리듬과 단순한 멜로디만 남긴 극도로 절제된 연극 양식이다. 슈프레히콜은 산신문극 등과 함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고, 이동극장에 적합한 선전 양식으로 카프가 주목했던 연극대중화 전략 중 하나였다. 따라서 슈프레히콜은 메가폰, 신건설 등 1930년대 카프 관련 극단들에서 여러 차례 시도되었던 공연 양식이었다. <연극운동>2호가 슈프레히콜 특집으로 기획되었다는 점도 표지 디자인의 목적에 잘 부합한다.
이상춘 디자인, <집단>임시호 표지, 1932.1.
야나세 마사무 디자인, <전기>표지, 1930.1.
위 잡지의 배경에는 사선으로 처리되어 역동성을 강조한 붉은 사각형이 깔려있다. 그 위로 공장의 연료통, 굴뚝에서 뿜어나오는 연기, 철골 구조물(탑)이 겹쳐지고 그것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노동자의 얼굴이 보인다. 말레비치가 혁명의 징후로 명명했던 붉은색이 두드러지는 이상춘의 <집단>디자인은 무라야마 토모요시보다 좀 더 급진적이었던 마보 출신 작가 야나세 마사무의 전기 표지와 매우 흡사하다.(서유리, 2016) <집단>의 표지도 <연극운동>의 경우처럼 사진을 활용하고 있는데, 사진 속 인물이 진짜 노동자였는지, 농민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군인이었는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배경과 함께 이 인물이 건강하고 행복한 혁명국가의 노동자를 상기시키도록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게 해석되도록 정교히 꾸며진 포토몽타주의 기술이다.
노동자의 웃는 얼굴이라는 이미지는 ‘혁명적 삶의 방식이라는 환상’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심어줄 수 있다. 다만 야나세 마사무가 기구를 든 노동자의 근육을 통해 노동자의 건강한 육체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상춘의 경우 노동자의 신체를 잘라버림으로써 행복한 얼굴만을 부각한다. 이로 인해 이상춘이 만들어낸 노동자의 이미지는 야나세의 그것보다 훨씬 추상적으로 읽힌다. 식민지의 노동자에게 건강한 육체를 투영한다는 것은 본인의 병든 육체가 증명하듯이 용납되기 힘든 환상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류보프 포포바 디자인, <거대한 오쟁이> 세트, 1922.
무라야마 토모요시 디자인 <아침부터 밤중까지>의 무대, 1924.12.
무라야마 토모요시가 게오르크 카이저의 표현주의 희곡 <아침부터 밤중까지>의 무대를 디자인해 ‘일본 최초의 구성파 무대’로 찬사를 받은 이후, 일본 좌익 연극계에서 구축주의 무대디자인은 다양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극단 신건설도 <서부전선 이상 없다> 공연(1933.11)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건설 무대장치부는 이상춘, 강호, 추적양, 이두성에 이르기까지 카프 미술계의 역량이 총집약된 역대 최대 규모로 조직되었다. 대규모의 조명, 폭발물과 가스의 사용을 수차례 광고한 것으로 보아 이 공연은 최소한 무대적 차원에서라도 구축주의적으로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포포바의 <거대한 오쟁이> 세트나 무라야마의 무대에서 볼 수 있는 바퀴, 베어링, (타틀린을 상기시키는) 탑, 계단 등 구축주의 무대의 중요한 요소들이 신건설의 무대 상에도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료나 관련 구술을 찾을 수 없어 이 공연의 무대가 어디까지 구현되었는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공연 직전, 준비된 무대를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인 거리에 있던 본정 연예관으로 급하게 옮겨야 했던 신건설의 공연은 무라야마의 경우와는 다른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2층 무대가 공연 중 무너진 것이다. 시작부터 불안했던 이 공연은 무대의 붕괴로 인해 구성주의 무대의 압도적이고 집체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무너진 2층 무대, 슬픈 결말에 도달하고 말았지만, 이것이 식민지 아방가르드 예술이 처한 현실 그 자체였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독일과 일본을 거쳐 식민지 조선으로도 유입되었다. 다만 식민지라는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으로 인해 서구나 일본에서처럼 강렬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혁명 예술로서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책에서 계속 서구의 중심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시각이 엿보인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