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근대성과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이 책은 당시 한국문학 근대성 연구에서 젠더의 주제화부터 연구의 대상과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친 텍스트 중 하나다. 한편으로 이 책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한데, 리타 펠스키는 이분법적 비판을 넘어선 젠더적 관점을 통해 근대성과 근대적 이론의 보편적 신화를 해체하고 연구 대상 역시 다양한 문화적 텍스트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가령 근대성에 대한 대표적 저작인 버먼의 『현대성에 대한 경험』에서 ‘파우스트, 마르크스, 보들레르’로 제시되는 전형적인 근대적 영웅은 남성성과 근대성을 대표하며 근대적 경험을 남성적인 것으로 국한한다. 이에 반해 게일 피니는 여성의 근대성을 다루지만 여성적인 것으로 상징되는 사적인 관계를 근대적 모순의 중심에 둠으로써 여성성을 단일화, 보편화하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펠스키에게 있어 근대성도 여성성도 동질적인 합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상충되는 다양한 반응들이 교차하는 개념이다. 결국 근대성의 논의에서 젠더를 문제시한다는 것은 배제된 주체들을 복권시킴과 동시에 그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성을 분석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분석 대상 역시 문학작품 뿐 아니라 사회학 이론, 멜로드라마, 잡지, 정치 팸플릿 등 다양한 문화적 텍스트로 확장되며 장르를 넘나드는 이 텍스트들 또한 상호 관계 속에서 주체들의 동일한 태도로 수렴될 수 없는 불일치와 모순의 증거가 된다.
2.
이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남성 작가들의 텍스트에 나타난 표상을 중심으로 근대의 외부로서의 여성, 소비자로서의 여성, 글쓰기의 여성화 현상을 분석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19세기 서구적 근대성의 대표적인 상징들, ‘공적 영역, 군중 속의 인간, 이방인, 댄디, 산책자’와 같은 표상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성별화된 것이다. 19세기 서구의 대도시를 하릴없이 거니는 여성은 창녀로 여겨지곤 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근대적 ‘산책자’로서의 여성이 존재하기는 힘들다. 근대적 경험이 남성 중심으로 보편화된 것과는 달리 초기 낭만주의 텍스트에서부터 여성은 문명의 바깥에서 구원의 장소로 표상되었다. 삶의 소외나 파편화 등 근대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과 함께 여성성은 근대의 외부에서 근대성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진정성의 영역으로 재현되고는 했다. 펠스키는 사회학자 짐멜의 텍스트를 통해 근대의 주체로서 남성들이 여성성을 어떻게 소외시켜왔는지를 보여준다. 짐멜에게 있어 여성은 향수의 대상으로 존재하며 근대로부터 타락하지 않은 비시간적, 비사회적 존재로 기원의 장소가 된다. 19세기 유럽의 급격한 산업화는 전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여성은 근대의 비인간성을 전복하는 모티프로서 과거를 담당한다. 이러한 여성성은 어머니를 결핍 이전의 완전한 것으로 간주한 정신분석학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소비문화 속에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탐욕스러운 소비자로 표상된다. 근대성의 동력을 생산력으로 보았던 19세기 산업문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들에 의해 소비, 사치, 무절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페미니즘 담론은 여성을 소비문화에 유혹당하는 수동적 주체가 아니라 능동적인 소비자로서 재의미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펠스키는 에밀 졸라의 『여인천국』, 『나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분석을 통해 이들 텍스트에서 소비의 의미가 알려진 바처럼 일치되지 않으며 대신 사치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불안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말한다. 여성의 소비 욕망은 당대에 일관되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소비는 중간계급 여성의 생활에서 의무로 제시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 사회의 안정을 위협할 것이라는 주장도 공존했다. 가령 당시 ‘백화점’은 부르주아 계급의 생활방식을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고 계급 차이를 재생산하는 동시에 그 차이를 상품 소비를 통해 희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백화점은 중산계급 여성에게 탐닉과 환상을 약속하면서 감각적 경험, 욕망, 상업화가 연결되는 새로운 공적인 공간으로 대두되었다. 펠스키는 소비자로서의 여성을 단일한 인과론적 경제 모델이나 순수한 저항의 공간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펠스키는 모더니즘 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의 특권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남성 중심 모더니즘 연구뿐 아니라 정전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치중하는 페미니즘 연구도 비판한다. 부르주아적 지배 담론에 대항한 아방가르드는 동시에 여성성의 영역을 경멸함으로써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담지체가 된다. 칼리니쿠스가 두 가지 근대성으로 명명한 부르주아적 합리성과 급진적 예술 사이의 대립은 성 정치학이 개입될 때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펠스키는 유미주의자들의 ‘여성적 글쓰기’를 분석하며 그들이 구사한 성별의 유희적 전복과 여성성의 전유는 성차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별의 위계 관계를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문학에서의 실험과 같은 비유, 유미주의자의 무관심한 관조 속에서 여성의 육체는 물질성이 제거되며 페티시즘적 대상이 된다. 결국 성차는 전복된 것이 아니라 ‘수사학적 기표’로 환원되었을 뿐이다. 펠스키는 여성적 글쓰기, 여성적 텍스트성이 지배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호소의 연장선에서 데리다, 들뢰즈, 가타리 등에 의해 철학에서 반복되는 ‘여자 되기’ 모티프도 비판한다. 여성적인 것을 유동성과 모방의 유희로 신비화하는 이러한 전략은 오히려 성차의 위계적 관계 형식을 각인한다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는 근대성과 여성성의 관계에 대한 여성 자신의 재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당대 엄청난 인기를 구사했던 영국 작가 마리 코넬리의 작품 분석을 통해 대중 소설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지적되고 미학적으로 평가절하되었던 ‘도피주의, 멜로드라마, 감상벽’과 같은 특징을 ‘대중적 숭고’로 읽어내며 근대문화의 중요한 측면으로 다룬다. 또한 펠스키는 19세기 말 영국에서 일어난 선거권 투쟁을 통해 여성 정치 운동에 나타난 근대적 시간을 분석하고, 프랑스 여성 아방가르드 작가 라 쉴드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 성도착자를 통해 남근 중심적 성 담론을 여성이 어떻게 전유하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에서 여성 자신의 재현 역시 일관되지 않으며 모순적인 입장이 충돌하는 장소로 여성성 혹은 대중성이 그 자체로 순수한 저항의 입장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3.
펠스키는 방대한 문화 텍스트에 나타난 근대성에 젠더를 기입하며 기존의 논의에 균열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토록 흥미로운 주제들을 종횡무진하며 비판의 긴장을 놓지 않는 펠스키의 글은 보편적이고 단일화된 기술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기존 논의의 비판에 기대어 전개되기 때문에 주체의 복수성과 모호하고 모순적으로 교차되는 실재적 담론이 존재를 균형 있게 확인시켜주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물론 근대성은 담론적 구성물이며 근대는 끝나지 않았고 계속 쓰여야 한다는 펠스키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계속된 다시 쓰기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편성’, ‘동일성’에 대한 비판이 현재에도 여전히 그 ‘계속 쓰기’의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는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