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교연포럼> "체제전환을 위한 정치학적 모색 1: 포퓰리즘, 민주주의를 위한 독이 든 선물?"
발표 정정훈
2022년 서교연은 “같은 현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른 미래를 만들어 갑시다” 공동성명[#다른세계로길을내는활동가모임]에 발맞추어(https://en-movement.net/323), <#체제전환을_위한_정치학적_모색>이라는 주제로 여러 차례의 포럼을 가질 계획입니다. 이에 첫 포럼으로 한상원 회원은 <포퓰리즘의 이중성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정정훈 회원은 <인민이 인민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오늘은 정정훈 회원의 글을 공개합니다.
(6월 14일 오후 7시 30분에는 "체제전환을 위한 정치학적 모색 2: 정치의 새 전선들"에서는 김보명(이화여대 여성학과) 선생님을 모시고 김보명 선생님의 "보수페미니즘은 '여성'을 구할까?"와 김현준 회원의 "민주화체제의 '정치적인 것과 포스트-민주화의 '스캔들':집권민주화세력의 헤게모니 실천과 그 패착에 관하여"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 발표문의 성격에 대하여
19대 대선이 국민의힘의 승리로 종결되면서 많은 진보인사들과 민주주의자들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끝장날 위기에 처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5년을 돌아볼 때, 국민의힘에 대척점에 서있다고 자처하던 민주당의 집권기에 한국 민주주의가 심화되고 확장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나 또한 회의적이다. 현재의 사회적, 경제적 체제를 문제화 하지 않은 채, 현 체제 내에서 집권세력이 누구인지만을 문제 삼아서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심화나 확장은 불가능하다. 즉 기존의 체제 내에서 누가 더 민주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기존 체제가 과연 민주적이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장, 혹은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집권세력의 교체가 아니라 체제의 전환이 관건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체제를 전환하는 정치를 위해서는 그 정치를 수행할 집합적인 주체가 필요하다. 이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최근 한국의 진보적 담론장이 포퓰리즘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특히 이론의 차원에서도 샹탈 무페나 낸시 프레이저 등이 제시하는 좌파적, 혹은 진보적 포퓰리즘이 이 문제를 사고하기 위한 주요한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에 포퓰리즘은 진보적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이론적으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주목받고 있는 듯하다.
지금 발표하는 이 글의 모태가 되는 글인「인민이 인민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 '우리, 인민들'과 작음 포퓰리즘의 각축」이 실린 《문화과학》 108호(2021년 겨울호)의 특집 '포퓰리즘의 문화정치'도 그러한 맥락에서 기획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 글에서 19대 대선 이전의 상황 속에서 한국의 포퓰리즘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을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비록 그 글이 19대 대선정국의 한 가운데서 집필되었지만 대선과 관련된 쟁점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대선 그 자체에 대한 논의보다는 차라리 답답하기 그지없는 19대선 정국의 대중정치적 조건에 대한 질문이 그 글의 배후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나는 당시 대중들의 정치가 전개되는 양상을 '소문자 인민들(people)이 주축이 된 작은 포퓰리즘 간의 각축'이라는 테제로 제시했다. 이후 본문에서 상술하겠지만 그 글에서 제기한 소문자 인민들이란 전통적으로 서양정치사상사에서 주권자로서 제시되는 인민과는 다른 존재자들이다. 시민혁명의 정치철학에서 인민은 《독립선언문》이 보여주듯이 대문자로 표기되는 인민("We the people")으로서 통일된 주체, 혹은 단일한 의지의 담지자로서 표상된다. 나는 이를 대문자 인민(the people)이라고 규정했다. 즉 대문자 인민이란 개인들의 권리를 보편적으로 보장하고자하는 의지에 바탕해 형성된 초개인적(supra-individual)인 정치적 주체를 의미한다. 시민혁명 전후의 서양 정치사상은 이 대문자 인민을 국가의 기체(subject)이자 주권의 주체(subject)로 파악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개인들의 의지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점이다. 복수의 다양한 개인들이 하나의 의지로 통일 될 때, 그들은 인민이 되는 것이다.
내가 《문화과학》에 쓴 글에서 제기한 소문자 인민들이란 대문자 인민과는 다른 정치적 주체들을 포착하기 위한 개념이었다. 이러한 개념화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요즘 정치권과 학계에서 회자되고 주목받는 포퓰리즘이라는 쟁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포퓰리즘은 어쨌든 인민의 정치행위를 함의한다. 그런에 이때 인민은 시민혁명의 정치사상에서 제시하는 단일한 의지로 통일된 초개인적 정치주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권력투쟁을 엘리트들이 제도적 정치의 틀 내에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에게 직접 호소하거나 다수의 직접행동을 통해 그 투쟁을 수행하는 양상을 지칭하는 포퓰리즘에서 인민이란 대중과 다른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민혁명론에서의 '인민'과 포퓰리즘론에서의 '인민'은 그 기표가 같다고 하더라도 기의에서는 일정한 차이가 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인민은 모두 단일성을, 그것이 정치적 의지의 단일성이건 요구의 단일성이건, 어떤 단일성을 함축한다. 하지만 내가 '소문자 인민들'이라는 개념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대중들의 정치를 포착하고자 했을 때의 인민은 단일한 초개인적 주체성이 아니라 서로 반목하거나 타자를 배척하는 복수의 주체성들이라는 뜻이었다. 즉 태극기를 들고 집회하는 노인들,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조리돌림과 모욕적 비난을 난사한 대깨문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정규직 노동자들, 페미사냥에 광분하는 남성들, 생물학적 여성만을 챙기겠다며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부정하는 여성들 등과 같이 상반된 정치적 의지에 따라 집결한 무리들이 소문자 인민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포퓰리즘을 작은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작은 포퓰리즘들 사이의 각축이라는 상황이 진보적이거나 좌파적 정치주체 형성을 저지하고 있기에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와 무페, 혹은 그들 각자의 논점보다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제기한 교통양식의 변혁이라는 논점을 중심으로 대중들의 정치를 사고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체제 전환을 위한 주체구성을 저지하는 조건들에 대한 해명이라는 문제의식은 그 글의 배면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의식을 전면화한다면 《문화과학》에 실은 글에는 여전히 모호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문자 인민들에 의해 수행되는 작은 포퓰리즘들의 층위를 구별할 필요가 있으며, 왜 민주화 이후 30년이 넘게 지난 시점에서 작은 포퓰리즘들의 각축이 대중정치의 주된 양상이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 발표 자리에서는 《문화과학》의 글을 일정하게 반복하면서도 (소문자 인민의 구성 메커니즘과 작은 포퓰리즘들에 대한 설명은 거의 그 글 그대로 활용할 생각이다). 체제전환의 정치적 주체 형성을 가로막는 조건에 대한 탐구라는 맥락에서 고쳐보기 위한 시도를 해볼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글로부터 고민이 많이 진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발표문의 제목이 「인민이 인민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 ver.1.5」이다. 아직 2.0 버전에는 도달하지 못한 단계의 글이라는 이야기이다. 오늘의 토론이 ver.2.0을 만들기 위한 좋은 자원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