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부 지도 그리기
교차성, 정체성의 정치, 그리고 유색인 여성에 대한 폭력 (3)
킴벌리 크랜쇼
단감(페미니즘 번역모임) 옮김
앨리슨 워커의 소설 『컬러 퍼플』에 대한 논쟁은 흑인 공동체 안의 성폭력을 드러낼 때 발생하는 정치적 비용에 대한 내부 토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부 비평가는 워커가 흑인 남성을 폭력적인 짐승으로 묘사했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워커가 주인공 셀리를 정서적, 육체적으로 학대당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승리하는 방식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 혹평한 비평가도 있었다. 그 비평가는 워커가 셀리를 통해 자신이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어떤 흑인 공동체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흑인 여성의 모습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셀리는 사실성이 전혀 없는 인물이라는 주장은 집단 내 폭력에 대한 토론을 묵살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셀리가 우리가 알던 어느 흑인 여성과도 다르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소수집단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진정한 공포는 대개 인종적 고정관념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잘못된 (그러나 아마도 이해할 만한) 시도 하에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흑인 및 다른 소수자 집단을 시종일관 고질적 폭력이 만연한 곳으로 묘사하며 흑인 폭력을 –통계적 재현이든 허구적 재현이든- 재현하는 더 큰 정형화 맥락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폭력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일보다, 흑인의 경험을 한층 더 풍부한 범위까지 묘사하는 다양한 서사와 이미지가 부재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다는 명목으로 제기되는 이런 문제의식이 만들어내는 억압은 심각한 희생을 야기하기도 한다. 소수자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한 정보가 차단되는 곳에서는 가정폭력 역시 진지한 문제로 제기되기 어렵다.
협소한 방향으로만 집중된 반인종차별 전략에 따라 정치적 실천을 하면 유색 여성을 고립시키는 다른 실천을 지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시아계 및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에게 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온 활동가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는다고 보고한다. 문화적, 사회적 요소가 억압에 기여할 때도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모든 여성을 위한 쉼터Everywoman's Shelter’ 운영자인 닐다 리몬테는 아시아계 공동체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지적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우선순위는 남자를 때리지 못하게 강제하기보다는 여자가 비명을 지르지 않게 강제하는 쪽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인종과 문화는 다른 방식으로도 가정폭력을 억압하는 데 기여한다. 유색 여성은 경찰 신고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유색인종은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은 경찰에 사생활에 대한 감시 및 통제를 맡기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또한 인종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공적 삶에 쏟아지는 무수한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적 세계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을 갖게 되면서, 공적 개입을 거부하려 하는 보다 보편적인 공동체 윤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가정은 단순히 가부장적 질서로 지배되는 남자의 성(城)이 아니며, 인종차별 사회에서 살아가며 겪는 모욕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안전한 피난처’만 아니었다면 폭력을 당한 유색 여성이 도움을 구할 수 있었던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또한 반인종차별 담론 안에서 유색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는 그저 인종차별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사고하는 일반적 경향도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젠더 억압의 문제는 남자에 대한 차별의 결과일 뿐이다. 물론 주류 사회에서 유색 남성이 겪는 스트레스를 고려하면, 인종차별이 폭력의 순환을 부추기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인종차별과 가정폭력의 연관성을 살펴보는 일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그러나 폭력의 연쇄는 이 한 가지 연관성보다 훨씬 더 넓고 복잡하다. 인종차별은 유색남성에게 지배적 남성이 즐기는 힘과 특권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부장제와 연결되어 있다. 폭력을 다른 영역에서 남성 권력을 박탈당해 벌이는 난동으로 이해하면서, 가정폭력의 해결책을 결핍된 남성이 권력을 더 획득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암묵적으로 연결하는 구조를 채택하는 것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오히려 유색 인종 공동체 및 가정에 미치는 역기능과 부작용을 드러내면서 그러한 권력을 기대하게 만드는 정당성에 도전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보다 발전적인 방향이다. 더구나 효과적인 중재를 위해서는 인종차별과 가정폭력 간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중요한 요소라 해도, 유색 여성이 폭력 없는 삶을 기대하려면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2. 인종과 가정폭력 방지 활동
인종 문제를 우선시하는 접근이 유색 여성이 겪는 폭력의 문제를 흐리는 작용을 하기도 하지만,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경험을 억압하는 경우도 있다. 백인 공동체 내 가정폭력에 관한 인식을 높이려는 전략은 폭력은 소수자들의 문제라는 통념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뒤 이러한 배우자 학대는 백인 공동체에서도 일어난다고 강조하며 허수아비를 공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무수한 1인칭 시점 이야기가 다음과 같은 진술로 시작된다. “나는 매 맞는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니었다.” 구타는 모든 인종과 모든 계급의 가정에서 일어난다는 구호는 학대 반대 캠페인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주제인 듯하다. 가령 1인칭 일화나 가정폭력 연구에서 구타는 인종, 민족, 경제 수준, 교육 수준, 종교를 초월하여 폭넓게 나타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이러한 반박조의 주장은 오직 가정폭력은 대부분 소수자 가정이나 빈곤 가정에서만 발생한다는 통념이 선행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실제로 일부 권위자들은 매 맞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따른 신화’를 명시적으로 부인한다. 몇몇 평론가는 구타는 오직 빈곤 및 소수자 공동체에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구타는 모든 계급과 인종에 똑같이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으로 변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평은 백인 중상류층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구타를 드러내지 못하게 막는 그 고정관념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비하면, ‘고정관념 상의’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가정폭력을 탐구하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정치화하려는 시도는 폭력은 ‘다른 사람’의 가정에서만 발생한다는 믿음에 도전한다. 이 수사학 전략을 채택한 대변자 및 그 외 사람들이 빈곤 여성 및 유색 여성의 필요를 배제하거나 무시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얼핏 보편적으로 보이는 이 주장 아래 깔려있는 전제는 주류 사회 집단의 감수성을 그 집단의 경험에 계속 집중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1991년 여성폭력방지법을 지지하던 데이비드 보렌(민주당, 오클라호마) 상원의원의 다음 발언에서 미묘하게 암시된 바와 같이, 가정폭력 피해자로 추정되곤 하는 ‘다른 사람’들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주로 백인 특권층을 집결시키기 위한 정치적 호소로 작용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 범죄는 도심의 거리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도시 및 농촌 지역 가정에서도 발생합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실제로 구타당하고 학대당하는 여성뿐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지금, 우리의 아내, 어머니, 딸, 자매, 그리고 동료들이 이러한 폭력 범죄가 만들어 낸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나 자신이 얻은 지위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성별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공포입니다.
보렌 상원의원의 발언에 암시된 전략은 ‘다른 사람’ 가정의 일일 때 폭력이 어떻게 무시되는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직 주류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정치화하는 데 작동한다. 이 전략은 백인 여성 피해자가 집중받을 수는 있게 하지만, 소수자의 문제로 여겨지는 한 그 문제가 계속되도록 방치하는 패턴을 없애는 힘은 거의 없다. 백인 공동체 내 가정폭력 프로그램을 위한 백인들의 지원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소수자 여성의 폭력 경험은 무시된다. 보렌 상원의원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이 가정폭력으로 고통 받는 모든 여성의 문제를 다루는 법률과 자원을 제공했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라는 보편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여성의 곤경을 지나쳐 자신과 닮은 친숙한 얼굴을 인식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정폭력의 여성 피해자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여성을 보호하자’라는 호소의 설득력은 자신의 인종과 계급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폭력이 고정관념대로 유색 인종이나 빈곤계층의 일이라 할지라도, 학대당한 여성은 언제나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 자매 또는 딸이지 않은가. 여성폭력방지법이 그 자체로 제한적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만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에는 폭력조차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겨지는 이유를 상원의원 및 정책 입안자들이 묻지 않으면, 유색 여성이 자원 및 관심을 동등하게 나눠받게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은 더욱 낮다. 가정폭력을 정치화하기 위해 이것이 ‘소수자’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라고 백인을 설득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한, 흑인 및 다른 소수 여성의 경험에 대한 예민하고 진실된 관심은 이 운동을 위태롭게 하는 일로 간주될 뿐이다.
보렌 상원의원의 발언이 가정폭력에 관해 자신만을 의식하는 정치적 표현을 보여주는 반면, CBS 뉴스 <48시간>은 언론에서 가정폭력을 분석할 때에도 비백인 여성을 타자화하는 패턴이 명백히 유사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은 학대의 피해자였던 여성 일곱 명을 소개했다. 여섯 명은 가족, 친구, 지지자, 심지어 비방자와 함께 얼마간의 인터뷰를 했다. 시청자는 이 여성들 각각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으며, 피해자들은 충분히 인간답게 그려졌다. 그러나 일곱 번째 여성, 유일한 유색 여성에게는 한 번도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그녀는 등장분량 내내 말 그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심하게 폭행당한 얼굴 사진들을 보여주며 소개되었고, 나중에는 그녀가 증언을 강요당했던 공판 영상을 통해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이 제시되었다. 이 여성과 관련된 다른 이미지는 피 묻은 방이나 피에 젖은 베개 사진 등이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수갑을 찬 모습이었으며, 카메라는 피가 묻어있는 그의 신발을 클로즈업했다. 이 방송에 등장한 모든 재현 중에서 그녀에 관한 것이 가장 이미지적이었으며 비인간적이었다. 이 여성이 ‘특별 출연’한 그 방송의 전체적 주제는 폭행당한 여성들이 검찰과 협력만 한다면 구타가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제에만 초점을 맞출 뿐 이 여성이 협력을 거부한 이유는 파고들지 못했기에, 이 프로그램은 매우 은근하게 그녀의 피해는 자신의 책임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그녀를 폄하했다.
모두 백인이었던 다른 여성들과 달리, 이 흑인 여성은 이름도 없고 가족도 없으며 상황도 없다. 시청자는 그저 피해를 입고 협조를 하지 않는 모습으로만 그녀를 본다. 그녀는 사진이 나오자 울었다. 그녀는 피 묻은 방과 자신의 망가진 얼굴을 억지로 보지 말라고 외친다.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그녀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그녀가 증언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 -두려움, 사랑, 혹은 아마도 둘 다- 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가장 불행한 것은, 다른 여섯 명과 달리 그녀에게는 에필로그가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여성들은 방송 마지막에 각자의 운명이 밝혀졌지만, 흑인 여성에 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대표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자신만의 문제를 안은 채 곧 잊혀졌다.
이 예시를 통해 나는 ‘다른’ 여성들이 완전히 배제되는 일만큼이나 경험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일에 의해서도 목소리가 묵살된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토큰주의, 대상화, 관음증적 태도에 따른 포함은 적어도 완전한 배제와 마찬가지로 집단의 역량을 박탈한다. 흑인 및 다른 소수자 여성의 이미지가 그들의 경험을 인간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제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용되는 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치화하려는 노력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반인종차별 운동에서도 소수자 공동체 내 폭력의 현실을 강제로 억눌러서는 상황이 그다지 진전되지 않을 것이다. 뉴스 <48시간>이 분명히 보여줬듯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미지 및 고정관념은 손쉽게 동원되어, 소수자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가정폭력의 본질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3. 인종과 가정폭력 지원 서비스
가정폭력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유색 여성의 특정한 교차적 필요를 생략하거나 완전히 무시하는 역량강화 정책, 우선순위, 전략을 수용하면서, 유색 여성의 종속 및 주변화를 재생산하기도 한다. 젠더, 인종, 계급이 서로 교차하여 유색 여성이 폭력을 경험하는 특정한 맥락을 만드는 동안, ‘조력자’가 내린 어떤 선택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바로 그 저항 전략 속에서 교차적 종속을 재생산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비영어사용자 여성들에게 가정폭력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문제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뉴욕 주 사회복지국 부국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직업 및 실질 경제 개발 프로그램사(PODER, 포더)의 복지사업 책임자 다이아나 캄푸스는 위기에 처한 라틴계 여성이 영어 구사력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몇 번이고 쉼터에 입소를 거부당한 사례를 상세히 보고했다. 그 여성은 자신과 아이를 모두 죽이겠다는 남편의 협박에, 십대 아들과 함께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녀는 포더에서 운영하는 가정폭력 핫라인에 전화를 걸어 자신과 아들이 피신할 수 있는 쉼터를 찾았다. 대부분의 쉼터가 아들을 동반한 여성은 수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틀 동안 거리에서 지내야만 했다. 핫라인 상담사가 마침내 엄마와 아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기관을 찾았지만, 상담사가 쉼터의 입소 담당자에게 해당 여성이 구사하는 영어가 제한적이라고 알리자, 담당자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수 없다고 답했다. 위기 여성이 다시 전화를 걸어 쉼터의 ‘규정’에 대해 들은 뒤, 그녀는 천천히 말해주면 영어도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캄푸스가 설명한 대로, 핫라인 상담사 밀드리드는 입소 담당자 웬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여성도 영어로 조금씩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웬디는 밀드리드에게 그 쉼터에는 입소자가 따르겠다고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쉼터 규칙이 있기 때문에 이 여성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밀드리드는 “여성이 그 규칙을 따르겠다고 동의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받아주실 수 없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웬디는 쉼터에 있는 여성들이 반드시 지원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고 하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면 그녀를 모임에 참석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밀드리드는 이 사람이 매우 위급한 처지임을 언급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집에 있는 밤에는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고, 그래서 강도도 두 번이나 당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녀가 남편이나 강도에게 살해될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도 거듭해서 알렸습니다. 밀드리드는 현 상황에서는 이 여성의 안전이 최우선이며, 일단 안전한 장소에 자리를 잡으면 지원 모임에서 상담을 받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입소 담당자는 영어권 여성만을 받는다는 쉼터의 규정을 다시 언급하면서, 뿐만 아니라 그 여성이 직접 쉼터에 전화를 해서 언어 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면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그날 피해 여성이 포더 핫라인에 전화를 했을 때, 그녀는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금까지 대화를 나눠 온 핫라인 상담사와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 되자 캄푸스가 개입하여 쉼터의 사무장에게 직접 연락했다. 쉼터의 한 상담사가 전화로 답변을 전했다. 캄푸스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상담사 마리는 그 여성을 쉼터에 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소외감을 느낄 것 같다는 이유였습니다. 나는 입소 과정 내내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통역을 해주기로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로 그녀의 상담을 보조해줄 매 맞는 여성을 위한 대변인을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을 지원할 것이라고도 밝혔습니다. 마리는 아들을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피해자를 더욱 희생시키는 일이기에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영어를 구사하지 않는 여성과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와도 소통을 하지 못하다 마침내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안전에 대해 극도의 우려를 표했고, 우리가 이중 언어 직원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때까지 그녀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보조하겠다고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몇 번의 전화가 더 오간 후, 마침내 쉼터는 그 여자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협상이 진행되던 도중 그 여성에게 한 번 더 전화가 왔다. 그러나 막상 계획이 자리 잡은 후에는 전혀 연락이 없었다. 캄푸스는 “정말 여러 번 연락을 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녀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지, 그리고 다음에 그녀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다시 전화를 하면 우리가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가 남아 있을지 궁금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여성은 보호가 절박하게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쉼터가 배타적 정책을 너무 엄격히 고수하는 터에 영어권 여성들에게 제공되는 보호를 받지 못했다. 쉼터에 이중 언어 인력이 부족한 상황보다 더 큰 문제는 친구나 가족이 그녀를 위해 통역을 해주지 못하게 하는 방침이었다. 이 이야기는 자원을 배분할 때 거리에서 신체적 위해를 당할 위험보다 통역자 없이 지원 모임에 참석할 능력을 더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삼는 페미니즘적 접근법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 요점은 쉼터의 역량강화의 상이 공허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쉼터의 관리자가 상정한 유형에 맞지 않는 여성들에겐 역량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다 그들은 결국 쉼터 운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과제 -여성을 위험에서 구하기- 달성하지 못했다.
여기서 위기 여성은 쉼터가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여성의 필요를 예상하거나 제공하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 있다는 위험 부담을 져야만 했다. 캄푸스는 “다른 매 맞는 여성들에겐 쉽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어떤 피해자에게는 영어 실력을 입증하라고 요구하여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더욱 가중시키는 일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선의의 무지 중 하나로 쉽게 넘겨버릴 수 없다. 단일 언어주의와 관련된 갈등 및 이 비극의 배경이었던 여성 경험에 대한 일원적 시각은 뉴욕에서 생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다수의 유색 여성이 언어 배제를 비롯하여 유색 여성의 이익을 주변화하는 그 외 여러 관행에 맞서 뉴욕주 가정폭력 방지 연합과 싸움을 거듭해왔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수차례의 교섭에도 불구하고 연합은 비백인 여성의 특정한 요구를 조직의 핵심 비전에 통합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연합이 해결하지 못한 이유를 처음에 유색 여성과의 상호작용을 독려한 협소한 비전과 연결시켰다. 뉴욕 주의 우드 스탁 –유색 인종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 에 자리한 연합 본부의 위치 자체가 유색 여성들이 정책 수립에 제한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유색 여성을 포함하려는 노력은 마치 부차적으로 덧붙인 것처럼 보였다. 연합이 유색 여성들을 모집하라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은 후에야 참여를 제안받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신입 회원’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그다지 우리나 우리 문제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이나 우선순위를 재검토하지 않고도 간단히 우리를 조직에 편입시킬 수 있으며, 그러면 우리도 행복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가장 공식적인 통합의 제스처조차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언젠가 몇 명의 유색 여성이 유색 여성을 위한 특별 전담팀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하자, 연합은 그 제안을 의제에 포함할 것인가에 대해 하루 종일 토론했다.
위원회에서 백인 여성과 유색 여성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조롭지 않았다. 페미니즘의 정의에 대한 견해차로 인해 발생한 갈등도 많았다. 예를 들어 위원회는 라틴계 공동체를 위한 원조 프로그램 관리에 라틴계 여성 직원을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나, 라틴계 위원이 선호하던 후보자를 채용위원회의 백인 멤버가 공인된 페미니즘 관련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시킨 일이 있었다. 캄푸스가 지적했듯이, 위원회의 백인 위원들은 자신들의 삶에 준해 라틴계 여성을 평가할 뿐 소수자 공동체 안에서 페미니즘적 의식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환경과 양상이 다르다는 점은 인식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지원한 여성 중 상당수가 자기 공동체 내에서 지위가 확고한 활동가 및 지도자였기에, 그 사실만으로도 이 여성들이 그 집단 특유의 젠더 역학을 이미 충분히 파악하고 있으며, 따라서 비교적 전통적인 페미니즘 경력을 갖추고 있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지원 사업을 담당할 능력이 월등하다는 점을 파악했어야 한다.
몇 달 후, 유색 여성들이 탈퇴하며 연합은 끝났다. 그 중 상당수는 백인 중산층 여성과 인종 및 계급 문제를 두고 싸우기보다는 지역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여성 문제에 맞서 싸우겠다며 공동체 기반 기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쉼터에서 거절당한 라틴계 여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쉼터 공동체 내에서 특정 관점 및 우선순위가 지배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색 여성의 필요는 계속해서 주변화되었다.
어떤 차이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가에 대한 싸움은 여성들 사이에서 추상적이거나 부차적인 논쟁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갈등은 차이만큼이나 중요하다. 권력에 대한 결정적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단지 가정폭력 반대 운동을 주도하는 여성들이 유색 여성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물질적, 수사적 자원을 통해 그들이 기본적 정책 수립 단계에서부터 유색 여성의 교차적 차이를 반영할지 여부를 결정할 권력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문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를 통합하는 일에 대한 투쟁은 누가 단체의 장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사소하거나 표면적인 갈등이 아니다. 폭력의 맥락에서, 이것은 때로 누가 생존하고 누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에 대한 극도로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B. 강간 사건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교차성
앞 장에서 나는 인종과 성 사이의 다양한 관계를 묘사하거나 프레임을 구성하기 위해 교차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인종차별과 가부장제의 상호작용을 일반적으로 명료화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교차성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나는 종속의 중첩된 체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페미니즘과 반인종차별 운동의 주변부에 있는 유색 여성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교차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인종과 성별 요소가 강간의 맥락에서 조회될 때, 교차성은 인종차별과 가부장제가 강간의 개념을 만들어온 방식을 명확히 드러내고, 이렇게 통합되어 있는 지배 체계 하에서 유색 여성이 지닌 고유한 취약성을 설명하며 반인종차별 및 반강간 담론에서 유색 여성이 주변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