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사라 아메드의 <Affective Economies>




번역: 박구비

감수: 단   감







공포의 글로벌 경제(Global Economies of Fear)

  우리는 공포가 집단적 형태를 지키기 위해서 작동하는 과정을 더욱 명확히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이 되는 공포의 물질적 경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 주체가 집단적 주체와 일치되며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정동의 실패란 바로 집단적 주체의 표면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주체나 대상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공간적이고 신체적인 공포 경제의 복잡성은 9.11 이후의 글로벌 경제 안에서 너무나 분명해졌다. 공포는 테러리즘으로 명명되고, 테러리스트들은 파괴와 죽음을 일으키려는 자이자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자로(덜 유동적이고, 이동의 자유가 더 적은) 극한의 공포의 행위자와 동일시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 존 하워드(John Howard)가 언급한 것처럼, 미국과 “세계 시스템”에 대해 빈 라덴이 가진 “혐오”는 개인의 자유, 종교적 관용,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 무역의 흐름 위에 세워졌다. 이는 “그가 공동체와 국가들이 서로를 등지게 하기를 바라면서 공포를 퍼뜨리고, 불확실성을 만들어 내고 불안정성을 촉진하고자 하기 때문”[각주:1]이라는 의미이다. 하워드는 공격으로서의 테러 행위를 국제적인 자본의 유동성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의 신체의 이동성에 대한 것으로, 즉 그들이 “두려움 없이 세계를 쉽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권리에 대한 것으로 읽어낸다. 나는 공포 경제 안에서 이동하는 것과 달라 붙는 것에 대한 대안적인 독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다른 종류의 신체적 울타리, 억압, 억류뿐만 아니라 이동성의 형태를 구분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 예시에서 우리는 주체의 신체 이동성이 위협받는다고 제시되는 동안에도 글로벌 경제 속에서 자본의 유동성이 어떻게 방어되는지 살펴보았다(자본은 “깨끗한 돈”로 구성되어, 동결되거나 유통되지 않아야 하는 테러리즘의 “더러운 돈”에 대응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영국의 시민들에게 가장 먼저 지시된 것은 테러의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즉 “일상적인 일로 돌아가는 것”, “여행하는 것”, “시간을 보내고 소비하는 것” 등이었다. 실제로 국가를 파괴하려는 테러리스트들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한 방법은 시민들이 두려워하지 않으며, 국가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는 “미국의 미래가 공포의 미래가 되지 않을지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이들은 테러의 시대를 말한다. 나는 앞선 투쟁들과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위험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들이 아니라, 이 국가가 우리의 시대를 정의할 것이다. 미국이 확고하고 강인한 한, 이 시대는 결코 테러의 시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각주:2]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국가는 공포에 대한 취약성과 상처들을 변형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이 서술의 형식 속에서 자기 결정이라기보다는 “테러에 의한 결정”으로 읽힐 응답에 승리한 것으로 구성된다. 이 자기 결정 행위 속에서 부시는 테러 행위를 전쟁 행위로 바꾼다. 이는 공포의 근원을 제거하여 세계를 어떤 자본과 어떤 신체들을 자유와 문명의 기호로 만드는 장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테러의 정동이 억압이 아니라 재동원의 중요한 근거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과 집단이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서 공포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포 정동은 분명히 항공 이동의 엄청난 감소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공포를 상정하지 않고도 억압이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함께 하게 해 준다거나, 억압이 공포와 같은 것의 유일한 효과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서 하이데거를 참조하여 내가 강조했듯이, 공포의 대상은 옆을 지나갈 것이다. 이 구조적 가능성은 살아있는 공포 경험의 일부이다. 사건이 일어나고 대상을 구성하는 동안(얼마나 많이 지나가든 간에, 그 옆을 지나간다는 것은 이미 사건을 사건으로 합병하면서 현재의 외부에 살아갈 위험에 있다는 뜻이다.) 공포는 빠르게 불안으로 미끄러진다. 이 불안 속에서 위험에 처한 것은 대상의 접근이 아니라, 대상으로의 접근이다. 사건으로의 접근은 반복되고, 물신주의적 대상으로 변형되어 일치의 형식과 관련된다. 개인들이 그들 자신을 공격하에 있는 국가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물론 이것은 국가가 그 자신을 공격당하고 있거나 공격당했던 개인들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일치의 과정을 반복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일치가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되는 개인들의 유동성(이동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일치를 중재하는 공포의 경험은 사랑의 애국적 선언들로 살아난다. 이는 집 그 자체를 테러에 맞서는 방어로써 동원한다. 주체가 집에 머문다면, 이제 집은 국가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변형된다. 성조기의 물결을 통해서. 공포의 순환에 국기의 의미가 필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마치 그러한 국기들이 국가적 사랑을 가리키는 것처럼. 오히려, 우리는 이 국기가 접착력 있는 기호가 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이 접착력이 국기를 일관적으로 보이게 하는 다른 “국기 기호들”에 달라붙게 하는 방식 말이다(“서로 붙어있는 것”으로서의 국가). 국가에 대한 사랑(애국심)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영토의 지배를 의미해 온 기호로서의 국기들은 “함께함”이라는 형식을 보여주는 효과를 가진다(어떤 이들과는 함께 하는 반면, 그 이외의 타인들과는 적대하는 방식으로). <뉴욕 타임즈 매거진>의 어느 기사에서 조지 패커(George Packer)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꽃처럼 피어있는 국기들을 보면서 나는 그것들이 실종된 이들의 사진만큼이나 빠르게 감정을 건드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게 이 국기들은 무기력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각성, 비탄, 단호한 결의, 심지어 사랑을 가리킨다. 국기들은 미국인들에게 동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함께 공격당했기 때문이다.”[각주:3] 공포의 대상에서 방향을 틀어 향하는 곳은 “동질감”을 의미하는 집이다. 방향의 전환은 “동료애/유대감”의 기호들의 반복과 관련된다. 이 전환은 의무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국기를 달지 않는 것은 동료애 부족으로 읽히거나, 나아가 테러의 기원으로도 읽힌다(조지 부시의 언급을 바꿔 말하면, 당신이 “우리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리의 적”으로 보일 수 있다.).[각주:4]


  사랑의 기호들의 효과로서 고착된, 국가에 대한 동일성으로서의 사랑에 의해 매개되는 공포가 신체들을 움츠러들게 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서 공포의 대상들로부터의 방향 전환은 집을 향한 전환과 관련이 있다. 이 형태의 사랑(동일성의 사랑)으로 매개된 공포는 신체들을 필수적으로 움츠러들게 하지는 않지만, 집단적 신체의 동일성을 통해서 신체가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도록 만들지도 모른다. 이 집단적 신체는 개별적 신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 신체를 대표하여 움직인다. 다시 말해서, 분명히 미국이 어느 신체를 억제하는 일은 동원의 형식으로 기능한다. 집에 머문다는 것은 전쟁 중인 국가에 상징적 동일시를 하며 신체를 동원할 수 있게 한다. 2002년 조지 부시의 연합국 연설에서 동일시의 효과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마치 우리 나라 전체가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더 좋은 모습들을 보는 것 같았다.”[각주:5] 이로써 미국은 집단적 나르시시즘의 경계를 “간파”하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잡혀”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자기에 대한 사랑은 국가에 대한 사랑이 되고, 이는 “우리 편”인,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테러에 대한 대응을 정당화한다. 이를 통해 “함께함”이 “유사성”의 기호로 전제되고, 유사성이 필수 요소 혹은 생존의 조건이 된다. 만약 테러 사건이─공포를 일으키려고 찾고 있는─자본의 유동성과 어떤 신체들의 동원을 방어하도록 한다면(국가에 동일시하는 집과 국가로서의 집 모두를 통해서), 누가 테러를 통해서 억압될 것인가? 누구의 취약성이 위험에 처할 것인가? 잘 기록되어 있듯이, 9·11 사건은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어떤 신체든지 가둘 수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의심되는 사람들의 즉각적인 구금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방의 정부 역시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어떤 신체든 가둘 수 있는 권리를 법제화하면서 테러에 응답해 왔다. 2000년 영국의 테러 개정법은 장관이 영국 안에서 누군가의 존재가 국가 안보에 위험하다고 판단하거나, 누군가를 국제 테러리스트라고 의심한다면, 증명서를 발행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위험 여부에 대한 평가는 신념의 문제가 되고, 의심 그 자체는 구금의 근거가 된다. 구금 권력의 확대는 단지 상징적인 것도 아니고, 테러리스트의 구금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어떤 신체도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는 구조적 가능성에서 우리가 재도입하고 확대한 것은 가두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는 구조적 가능성이, 같은 방식으로 가둘 수 있는 권력의 확대로 인해 정동된 모든 사람으로 번역될 수는 없다. 이는 사람들이 종종 테러리스트 네트워크와 단순히 이름이나 직장 혹은 거주지와 같이 매우 가느다란 연결고리로 인해 구금되어 있기도 한다는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뉴요커>에 실린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아리스티드 R. 졸버그(Aristide R. Zolberg)는 이 과정을 인종적 프로파일링의 형식으로 간주한다. “2001년 9월 11일에서 11월 사이에 미국에서 구류된 1,147명 중에서 일부는 공격의 상황적 연결의 근거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보에 의거하여 선택되거나, 의심스러운 행동이나 교통 법규 위반 때문에 제지당한 사람들은 중동이나 남아시아의 후손’이었다.”[각주:6] 무니어 아마드(Muneer Ahmad)가 묘사하듯, 9·11 이후 ‘아랍, 무슬림과 남아시아 이주민들의 신체와 정신 그리고 권리에 대한 끊임없는(unrelenting), 다원적인(multi-valent) 폭행’이 있었다.[각주:7] 실제로 레티 볼프(Leti Volpp)는 9·11에 대한 반응들로 인해 “‘중동, 아랍 혹은 무슬림’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그룹화하는 새로운 정체성의 카테고리”가 가능해졌다고 주장한다.[각주:8] “테러리스트일 수 있는” 그룹의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현재에 “두려워하는 이들”의 분명한 카테고리를 만들어 내는 동시에 이미 그 장소 안에 있는 고정관념에 의존한다. 우리는 프란츠 파농이 흑인과의 마주침에서 묘사하고 있는 반복되는 고정관념을 명확히 다시 떠올려 볼 수 있다. 이 반복은 타자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 내면서 작동한다. 이 공포는 그것 자체로서 특징을 갖는다. 


  중요한 것은 테러리스트라는 단어가 어떤 신체들에 들러붙는가 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과거의 명명의 역사들을 다시 열어 보이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설명하는 다른 단어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다(근본주의, 이슬람, 아랍, 억압적인, 원시적인과 같은). 실제로 이 환유의 미끄러짐은 진실들과 세계들을 만들어 가는 내부에서 용어들 사이의 일상적인 관계들에 대한 암시적인 논쟁으로 기능한다(예를 들면 이슬람테러리즘).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방식에서 명백한 진술을 필요로 한다. 환유로 이루어진 작업은 그것이 연결 고리를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은 테러리스트와 이슬람과 같은 단어들을 서로 붙여놓을 수 있다 ─ 심지어 논쟁들이 그러한 연결고리들을 풀어내도록 보일 때조차도. “이것은 이슬람에 대항하는 전쟁이 아니다”와 같은 발언들은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같은 묘사와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단어들을 다시 서로 들러붙도록 작용하면서 단순한 일시적인 것 이상으로 우연의 일치를 만들어낸다. 기호들 사이의 미끄러짐은 또한 신체에 “들러붙는” 기호와 관련 있다.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는” 신체는 “무슬림으로 보이는” 신체가 될 수 있다. 


  사건이 방어라는 명목으로 타자들을 구금하고, 특정한 폭력의 형태들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이 되는 것에서, 우리는 질문할 필요가 있다. 공포의 정동 정치에서 안보 작동(security play)을 하는 것은 어떤 역할인가? 마이클 딜런(Michael Dillon)이 제시했듯이 [각주:9]중요한 점은 안보가 “아닌 것(the not)”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아니거나”, “우리가 아닌” 것. 안보는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국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공포는 단순히 우리가 아닌 것의 공포가 아니다. 앞에서 내가 주장했듯이, 불안과 공포는 경계의 바로 그 효과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우리가 아닌” 바로 그 효과는 부분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공포의 근원으로 상상하는 타자로부터 돌아서는 방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경계들은 만들어지고 방어되며, 이미 위반되었다는(transgressed) 느낌으로 감시된다.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배치되기 위해서 타자는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야 한다. 처음에는 경계를 지키기 위해 경계의 위반이 요구된다. 이는 혐오뿐만 아니라 공포의 정치 역시 경계 불안으로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공포는 국가 안보를 방해하는 적절치 않은 타자들에 의해 침입받은 “홍수”와 “늪(swamps)”과 같은 언어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정치적인 헌법 속에서 불안의 존재론을 살펴볼 수 있다. 안전을 위해 긴요한 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안전하지 않다고 추정되어야만 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안보의 새 형식들, 국경 수비와 감시를 정당화하는 것은 안보 위기에 대한  발표이다. 위협하에 있다고 인식되는 가치들과 전통들의 “귀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위기의 담론들이 정치 내에서 활용되는지 생각해야만 한다. 이러한 위기들이 존재한다는 것, 공포와 불안들이 그 존재의 필수적인 효과로서 존재에 다가온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오히려 이는 중요한 위기들이 바로 생산해내는 것이다. 위기를 선언하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선언들은 종종 실제 사건들, 사실들 혹은 형상들과 함께 작동한다(예를 들자면, 결혼과 가족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데에 이혼률의 증가가 활용되는 방식이 그러하다). 그러나 위기의 선언은 그 사실/형상/사건을 읽고 이를 그 자체의 삶을 요구하는 물신적 대상으로 변형시킨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위협의 근원으로 읽히는 것에 반대하여 전쟁의 선언을 위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미 위협하에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지정하는 것으로, 바로 그것이 우리가 미래에 투쟁해야 할 “진실”로 자리 잡는다. 그 투쟁은 이후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 이해될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그 자신의, 사랑하는 이들의, 공동체의, 그리고 사람들의 죽음─그것은 무엇을 보존하거나 유지할지에 대한 내러티브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 때문에, 우리 때문에, 혹은 타자들을 대신해서 두려워할지 모른다. 9·11 이후, 죽음들은 단지 테러리스트들(삶을 가져간)의 위협하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테러리즘이 상징하는 모든 가능성에 의해 상징적이 되었다. 그 가능성은 해설자들이 세속화, 다문화주의 그리고 축소된 사회적이고 가족적인 유대와 같은, 내부적 형식들의 약화로 인해 연결된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제리 팔웰(Jerry Falwell)이 주장하듯이, “나는 정말로 이교도들(비기독교들), 낙태론자들, 페미니스트들, 게이들, 레즈비언들처럼 적극적으로 대안적인 삶의 스타일을 만들려고 하는 이들이... 아메리카를 세속화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들을 믿는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당신이 이것을(9·11) 일으켰다’고.” [각주:10]영국의 영국 국민당(the British National Party)은 9·11에 대해 언급하면서 국가의 도덕적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의 자리에 영국 내의 이슬람화를 위치시킨다. “그들은 영국을 2025년까지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꿀 수도 있다.” [각주:11]


  다양한 타자들의 현존에 의해 제기된 종교와 공동체의 약화에 대한 테러 범죄의 속성은 주류 정치에서 물론 규탄되었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비판들이 받아온 방식보다는 현저히 덜 “역겨운 반응”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무엇이 국가와 세계를 방어하기 위해(타자들을 직면하는 상황에서 공동체의 의지를 강화하는) 요구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가정들의 국경 세트는 전치되고 재작동한다. 내러티브의 논리에 따라. 이 사건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내부의 약화 대신, 우리는 회복과 생존과 공포를 뛰어넘는 책임을 내부적 강화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지 부시는 “이러한 대량살상행위들은 우리의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고 결정을 철회하게 하기 위해서 겁을 주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우리 나라는 강하다.”라고 말했다.[각주:12] 테러에 대한 반응은 국가 내부의 결속과 세계 자유국가 공동체들의 유대를 강화하는 방식이 된다. 테러의 상처는 “함께 붙어 있을 것”(일관성 있는 고착) 그리고 아메리카와 민주주의를 “강하게” 만드는 가치들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조지 부시의 2002년 주연방연설에서 안보에 대한 강조는 치안 유지 활동으로의 민주주의적 시민권의 변형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가 국토를 지키고자 힘쓰는 것처럼, 아메리카는 경계하는 시민들의 눈과 귀에 의존하여 계속될 것이다.” 시민권은 여기에서 마을 방범단의 형식으로 번역된다. 시민은 반드시 “의심스러운 타자들을 찾아낼”[각주:13] 의무가 있다. 시민권은 이웃들의 경계들을 감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감시자로서 시민의 역할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보증인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사회의 바탕이 되는 사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 번역된다. “우리 나라는 우리의 지역공동체를 재건을 위해 애쓰는 시민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멘토가 필요하다.”[각주:14] 아메리카를 테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할 가치들의 정의는 ─ 이 가치는 자유, 사랑, 연민으로 명명된 것이다 ─ 타자들에 의해 야기된 위험에 대항하여 특정한 기관과 사회적 형태들의 방어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가치들은 전쟁의 목표들과 목적들을 지배한다고 가정된 이상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행동과 행위의 규범들 역시 정의하기 위해 기능한다. 이는 무엇이 시민적이고, 시민사회이고, 합법적인 정부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국제적인 시민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서─즉, “불량 국가”나 “악의 축”로 명명되지 않으려면 ─ 타자들은 반드시 통치의 형식과 행위의 룰을 “따라야” 한다.[각주:15] 그 이후에 살아남게 될 가치와 진실 그리고 규범에 대한 강조는 특정한 사회적 형식들이나 제도들의 방어로 쉽게 미끄러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사회적 형식들이 개방성으로 정의됨으로써 “더 좋은” 것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이슬람 타자에 대한 근본주의적 정치와 폐쇄성에 대응하며, 자유 민주주의는(이는 명백히 “페미니즘”을 자유롭게 지지하는 것과 인종과 종교에 대한 관용이 모두 약화된 것이다) 미국에 “좋은” 것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존중”과 “종교적 관용”은 미국과 세계를 강하게 만드는 가치로 정의된다. 이러한 논쟁을 통해 전쟁은 “종교적 근본주의에서 여성들을 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친숙하고도 긴 제국의 역사를 가진 내러티브이다. 많은 페미니즘 비평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러한 내러티브는 다른 문화들의 이질성을 간과할 뿐만 아니라 ─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여 이슬람 문화권의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와 여성들의 저항이 존재한다는 것, ─ 미국과 소위 자유 국가들에서도 젠더적인 방식을 포함하여 여러 형식으로 억압이 유지된다는 것 역시 간과하는 것이다.[각주:16] 우리는 개방적인 문화와 폐쇄적인 문화 사이의 위계가 가지는 정치적 효과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개방적인 문화의 구조가 타자들에게는 닫혀있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 이에 따라 닫혀있는 것과 “집에” 억압된 것을 은폐하는 것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게다가, 사회적 형식을 보존하려는 매커니즘으로서 악화된 공포는 어떤 신체들과 더 연계된다. 사회적 형식들에 대한 이러한 타자들의 위협은 생존을 보장할 가치들로부터 뒤돌아 나온 위협으로 재현된다. 이 다양한 타자들은 규범들의 실패를 체현하며 다가온다. 그것은 그런 신체들의 근접이다. 그 신체들은 문명화의 형식이 퇴보했다는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이 세계에 대한 “진실”에 대항하여 외치는 자들은 세계를 “파괴”하고자 하는 테러리스트들과 일치된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형식들의 종말의 필수적인 결과로서, 죽음의 불안을 통해서 현재를 보존하려는 내러티브들은 불안을 어떤 신체에 자리매김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신체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물신적 성질을 갖게 된다. 그러한 신체들은 그들이 대상의 자리에 없을 때조차, 더욱 위험한 공포가 되고, 지나가는 것으로도 위협이 된다. 즉,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는 그러한 형식들을 볼 수 없을 수 있다. 우리가 차이를 말할 수 없을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현재는 상상된 타자들, 즉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형식을 갖출 이들로부터 공동체를 방어함으로써 보존된다. “아직 아님(not-yet-ness)”은 이 방어의 작업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방어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의해 만들어지고,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서 규범의 형식들을 물질화하는 데에 실패에 대한 배제와 제거를 정당화한다. 다른 타자들이 어떤 형식을 가질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누가 규범들로 살게 될 형식들을 물질화하는 데에 실패하는지, 신생의 형식들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는 계속되는 생존의 프로젝트로서 유지된다.  


  공포 경제 안에서 국제 테러리스트의 형상의 역할에는 우리의 반영이 깊이 투영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국가 안에서 타자들을 구금할 권력의 팽창과 다른 국가들에 대한 전쟁 그 자체의 잠재적인 확장을 정당화하는 내러티브가 테러리스트는 누구든 “될 수 있고”, 어디에든 “있을 수 있는” 구조적 가능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가 “그림자 속에 숨어 있”[각주:17]는 자라는 이유로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내러티브는 양날의 검이다. 반면에, 그림자 형상처럼 특정한 신체로부터 떨어져나온 테러리스트의 형상은 “특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 지나갈 것”[각주:18]이 된다. 그러나 테러리즘과 연합되어 읽히는 그 신체들의 이동성을 제한하는 이 객관성(detachment)은 바로 이러한 될 가능성(could-be-ness)이다. 이슬람, 아랍, 아시안, 동유럽. 공포는 이러한 신체에(또한 불량 국가의 신체에) 들러붙는다. 이러한 신체는 구금의 권력이 실행“될 수 있는” 곳에서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공포가 들러붙으면서도 그 신체들을 가로질러 미끄러진다. 이러한 기밀 정보(intelligence)와 감시의 형식들과 구금의 권리의 확대를 정당화하는 것은 테러리스트가 우리 곁을 통과할 수 있는 구조적 가능성이다. 명확히 그것이 어느 신체에서 존재하지 않는 한, 공포는 여기에서 어떤 신체들의 이동성을 확장시키고, 그 외의 신체들은 가두기 위해서 작동한다. 사무엘 웨버(Samuel Weber)는 “테러리즘이 국제적인 것으로 정의될 때, 그것의 위치를 찾아내고, 고려하고, 전형적으로 보여주고(personify), 발견하기가 어려워진다.”[각주:19]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어려움이야말로 국가 권력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국제적인 테러리스트의 형상이 난민의 형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두 형상들 사이의 미끄러짐은 엄청난 일을 한다. 이는 피난처를 찾는 이들, 테러와 박해에서 도망쳐 나온 이들을 거짓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들이 테러와 박해의 바로 그 동인이 될 수 있게 하는 한. 그들, 테러리스트와 닮은 그들은 잠재적인 절도범으로 동일시된다. 불법의 침략자들로 동일시된다.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해에 들어온 탬퍼호(Tampa) 의 하선을 거절한 것은, 이후에는 탑승하고 있는 이들이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관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난민과 다른 형상들을 상기시키는(절도범, 무서운 존재와 같은) 국제 테러리스트의 형상을 함께 붙여두는 것은 그들을 “우리의 공포”의 근원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국경 치안의 원인으로, “집이 없는” 자들로 구성한다. 미래는 언제나 공동체로 들어올지 모르는 혹은 지나갈 타자들에 의해 야기된 위협이다. 이 환유의 미끄러짐은 유사성을 만들어 낸다. 난민은 “우리의 집”을 파괴할지 모르는 테러리스트와, 공포의 대리인과 “유사하다(like)”. 형상들 사이의 미끄러짐은 이후에 공포의 대상이 될 타자들을 가두는 것에 관련되어 있다.


  공포의 경제로 인해 정동된 타자들의 신체를 가두는 것은 말 그대로 컨테이너 속 난민들의 죽음에서 가장 오싹하고 폭력적으로 드러난다. 이 죽음들은 그 피난처라는 희망을 상징하고 있는 바로 그 국가에 의해 애도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공포의 정동 경제 안에서 정말로 위험한 것은 무엇인가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









  1. John Howard, 오스트레일리아 국방 협회 연설, 오스트레일리아 외교부, 2001년 10월 25일, www. dfat.gov.au/icat/pm_251001_speech.html (2002년 7월 23일 접속) [본문으로]
  2. Georg W. Bush, 미 공동 의회 및 미국 국민들을 위한 연설, www. whitehouse, gov/news/releases/2001/09/20010920-8.html (2001년 9월 20일 접속) [본문으로]
  3. Georg Packer를 보라. “Recapturing the Flags” New York Times Magazine, 30 September 2001, 15-16, 슬픔과 사랑의 관계는 이 내러티브에 매우 중요하다. 공동체는 상실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하나가 된다. 주디스 버틀러가 언급하듯이, 9·11의 상실에 대한 공식적 반응들은 애도할 수 있는 삶과 애도불가능한 삶을 구분하도록 작동한다. 만일 그 상실된 삶이 “나와 유사하게” 인지되는 삶이라면, 사회적 규범에 근접한 유사성이 분명하다면, 그 삶은 공식적으로 애도된다. David Eng 역시 규범적이지 않은 상실들이 공적인 애도 담론에서 삭제되는 것을 연구한다. “‘아버지들과 어머니들’, ‘아들들과 딸들’, ‘형제들과 자매들’의 상실이라는 수사법은 국민 국가와 핵가족을 상징적인 피의 관계와 애국적 가정 사이를 자연스럽게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the Value of Scilence”, Theatre Journal 54[2002]:90), 국가의 정치에 대한 사랑과 슬픔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나의 책 Cultural Politics of Emotion의 “사랑의 이름으로”와 “퀴어 감정들”을 보라.(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2004) [본문으로]
  4. 미국의 아랍인들, 무슬림들 그리고 남아시아인들에게 국기의 게양은 국가와의 동일성의 형식으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기호들을 “덮는” 시도로도 읽힌다. 차이는 테러의 기원과 연합되기 때문이다. 무니어 아마드는 국기와 베일 사이의 ‘교체swap’에 대해서 연구한다. “Homeland Insecurities: Racial Violence the Day after September 11.” Social Text, no.72 (2002):110 [본문으로]
  5. George W. Bush, 2002년 주 연방연설, www.whitehouse. gov/news/releases/2002/01/20020129-11. html (2002년 7월 23일 접속) [본문으로]
  6. Aristide R. Zolberg, “Guarding the Gates,” in Understanding September 11, ed. Craig Calhoun, Paul Price, and Ashley Timmer (New York: New Press, 2002), 296 [본문으로]
  7. Ahmad, “Homeland Insecurities,” 99 [본문으로]
  8. Letti Volpp, “The Citizen and The Terrorist,” UCLA Law Review 49 (2002): 1575. [본문으로]
  9. Michael Dillon, The Politics of Security (London: Routledge, 1996), 34 [본문으로]
  10. Jerry Falwell은 2001년 9월 13일 Pat Robertson’s 700 Club에서 이 코멘트를 했다. 그는 바로 다음 날 오직 테러리스트들만 이 공격에 책임이 있었다고 말하며 사과했지만 국가 안의 불법적인 타자들이 존재하게 만드는 세속화가 바로 “그 문제”라는 메시지를 반복했다. [본문으로]
  11. 영국 국민당 웹 사이트, www.bnp.org.uk (2002년 7월 30일 접속) [본문으로]
  12. George W. Bush, 국민국가를 향한 대통령의 연설, www.whitehouse.gov/news/releases/2001/09/20010920-8.html (2001년 9월 11일 접속) [본문으로]
  13. 마을경비대가 어떻게 지식의 테크닉과 연관되는지에 대한 분석, “장소 밖의 신체들”로서 “이방인들”을 이식하는 작업은 Sara Ahmed, Strange Emcounters: Embodied Others in Post-Coloniality (London: Routledge, 2000)을 보라. [본문으로]
  14. George W. Bush, 2002년 주연방 연설, www. whitehouse, gov/news/releases/2001/09/20010929-11.html (2002년 7월 23일 접속) [본문으로]
  15. 우리는 조지 부시의 강력한 발언 “당신은 우리 편이거나 우리 적이다”를 흉내의 요구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내러티브에서 “우리 편”이 아닌 이들은 자동적으로 우리의 적으로 구성된다. “반대성(againstness)”는 테러나 테러리즘의 형식과 일치된다. 즉, 누구든 “우리 편”이 아닌 이는 테러리스트로, 테러리스트의 친구로,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이 된다. “함께 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공동체에 충성을 다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이는 시민적 삶의 형식으로서 인지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러므로 “당신은 우리 편이거나 우리 적이다”라는 발언이 사실을 진술하거나 수행적인 것이 아니라, 긴요한 것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다.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우리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타자들이 테러리스트나 불량 국가로 정체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은 반드시 시민성의 형식을 흉내내야 하고, 이 공동체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으로 가정된 민주적인 지배체제를 따라야 한다. 여기에서 라틴어에서 유사성을 의미하는 “asimilate”의 어원을 주목하자. 이 새로운 국제적 공동체는 아마도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사랑의 긴요성은 “같게 만든다”: 유사성은 이 공동체의 근거가 아니라 효과이다. 만약 공동체가 우리와 같은 타자들을 요구하는 것을 통해 서로 묶여있다면, 사랑의 내러티브는 재빨리 “다른 타자들”에 대한 혐오로 전환된다. [본문으로]
  16.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 정당화에 대한 젠더화된 담론의 중요한 페미니즘적 비평들은 Zilla Eisenstein을 보라. “Feminisms in the Aftermath of September 11,” Social Text, no. 72 (2002): 79-99; 그리고 수네라 토바니를 보라. “War and the Politics of Truth-Making,” International Journal of Qualitative Studies in Education 16. 3 (2003), 399-414. [본문으로]
  17. George W. Bush, 9월 1일 국가안보팀과의 회의에서의 대통령 발언, www.whitehouse.gov/response/faqwhat.html (2002년 7월 23일 접속). [본문으로]
  18. Brian Massumi, “Everywhere You Want to Be,” in The Politics of Everyday Fear, ed.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11. [본문으로]
  19. Samuel Weber, “War, Terrorism, and Spectacle” (Paper presented at Lancaster University, 2001년 12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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