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이후, 사회』 서평
배경진(서교인문사회연구실)
세월호 참사와 페미니즘 리부트, 이 두가지가 아무래도 내 10대 후반, 20대 초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난생 처음 집회에 나갔던 나는 집회 현장의 분위기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이후로 계속해서 찾아 다녔던 집회와 투쟁의 현장,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역시 세상을 바꾸려면 일단 현장으로 나가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늘 현장만 찾아갔던 건 아니고, 대안학교의 “은총”을 받아 학교에서 사회를 진단하는 좌담회니, 강연이니 이것저것 듣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현장에서 싸우지도 않는 사람들이 말로만 떠든다고 생각 해서였다. 세월호 참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벤야민이니, 도그마니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소위 지식인들이 참 재수가 없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저게 무슨 소용이람, 저런 것들은 집회같은 건 한 번도 나가본 적 없을 거야.”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강연자분들이 실제로 현장에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래 보였던 게 문제였을 뿐.
이론이란 걸 혐오하는 수준이었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이론 공부를 하겠다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말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이만큼 화가 났다!”나, “아니 근데 상식적으로,” 라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느끼게 됐다. 단순히 상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말빨 부족 뿐 아니라, 내가 왜 이 상황에 분노 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언어가 없었다. 언어가 없으니, 내 생각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저 화가 많은 어떤 사람일 뿐. 이 때, 우연한 계기로 이론이란 걸 만나게 되면서, “아,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였어!”라는 통쾌함과 “내가 틀린게 아니었어!”라는 위안을 동시에 느꼈다. 나의 감정과 행동에 이유를 붙여 주는 이론의 힘에 매료되어 내가 그토록 욕하던 소위 “먹물”의 세계에 서서히 진입하게 되었다.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내가 이론을 공부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이론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마주했던 기분을 다시금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양한 학자들의 이론을 경유하여 참사 이후의 사회를 다방면으로 분석하고 이를 통해 투쟁의, 고통의, 분노의, 이유를 언어로 풀어낸다. 이 작업은 “도대체 무엇이 참사가 되는지?”, “참사 유가족은 왜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지?”, “참사는 왜 아픈지?”, “참사가 왜 사회적 문제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안내서가 되어 준다. 이 책 전체 챕터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2장 인정이론의 관점에서 본 재난 참사 유가족 운동”이다. 유가족 운동은 너무 쉽게 평가절하되고,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곤 하는데, 2장에서는 유가족이 왜 투쟁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지, 이것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서평 쓴 배경진이 영화 <너와 나>를 보고 그린 그림. "이렇게 섬세하게, 세밀하게 사랑과 상실을 그려낼 수 있나?" 싶었다.
백선우는 호네트의 인정이론을 활용하여 재난 참사 유가족 운동이 지닌 의미를 드러낸다. 백선우에 따르면 유가족운동은 “대체 불가능한 상호작용 상대자의 죽음으로 인해 정서적 인정이 훼손되었고, 곧 사회적 인정 질서와 이에 대한 규범적 기대가 훼손된 데서 비롯된 규범적 투쟁”(81)이다. 호네트에 따르면 사랑은 사회적 인정 형태 중 하나인데, “참사”라는 폭력적 사건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 버리게 되면 이는 곧 “사랑”이라는 사회적인 인정 형태가 훼손되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투쟁은 곧 사회적 인정 질서가 파괴된 것에서부터 비롯된 규범적 투쟁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재난 참사 유가족 운동은 사회적 고통의 ‘사회적’ 특성과 자책의 감정을 매개로 하여, 재난 참사 희생자들이 수행했어야 하는 인정투쟁을 대신해서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83) 여기서 말하는 “재난 참사 희생자들이 수행 했어야 하는 인정투쟁”은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이 “안전한 지하철 만들기”를 4대 과제로 설정한 것이나 세월호 유가족 운동이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안전한 삶을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안전할 권리를 침해당했던 재난 참사 희생자들이 수행해야 했던 바로 그 인정투쟁”(83)이다. 백선우의 이러한 분석은 유가족 운동이 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제공한다. “인정투쟁으로서의 유가족 운동은 기존의 정치적 공론장, 또는 사회적 인정 질서 바깥에서 등장하며, 기존의 인정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확장하기를 요구하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이다.”(86) 유가족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목소리인 것이다. 이러한 백선우의 분석은 유가족 운동을 향한 비난과 의심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지적 토대를 마련해 준다.
이어지는 김현준의 글은 ‘문화적 외상이론’을 통해 참사의 고통은 왜 심리치료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지, 이 고통은 왜 사회적인 문제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외상은 어떤 충격적 재난 사태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인간과 제도적 행위자들에 의해 상징적으로 의미 부여되고 해석되는 문화적이고 집단적인 사건이다.”(95) 어떤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당연히 외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시간을 의미 있게 통과한 재난은 피해자와 생존자에게 위로를 주고 고통을 경감시키지만, 그렇지 못한 재난은 그 지난한 과정에서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다.”(93) 재난의 고통은 단순히 개인적인 심리치료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의미 있는 사회적 시간”을 보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적 외상’이란 공적 영역에서 돌봄과 책임, 도덕성과 연대성의 가치라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문제를 제기하는 외상’이라 할 수 있고, ‘문화적, 도덕적, 정책적 실패나 성취를 만드는 외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106)다. 재난 발생 이후 생존자와 유가족의 고통이 개별적인 심리치료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책임자 처벌이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사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유가족을 향한 비난이 거세지는 광경을 목격해왔다.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라거나 “언제까지 참사 얘기할 거냐”같은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 생각은 “저게 사람 새끼가 할 수 있는 말인가?”, “당연히 내 가족이 죽었는데, 이 슬픔이 어떻게 끝날 수 있겠어” 정도였다. “유가족이 왜 정치적인 투쟁의 주체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그냥 그런 건가 보다 생각했고, 유가족의 고통은 영영 끝날 수 없는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참사 발생 이후 남겨진 유가족의 투쟁은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 당한 상태에 대한 투쟁이기에 정치적일 수 밖에 없으며, 유가족의 고통은 공적이고 사회적인 돌봄과 책임이 없으면 경감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졌다. 비로소 투쟁해야 할 이유, 연대해야 할 이유가 확실히 나의 언어가 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재난과 참사를 대하는 현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해주고, 앞으로의 지향점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물론 이론 몇 줄 안다고 나를 둘러싼 세상이 바뀌지는 않지만, “내가 잘못된 게 아니구나” 혹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구나”를 깨닫는게 이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는 걸 안다. 나를 둘러싼 흉하고 불편한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언어적 폭력들이 나를 해치지 않고, 유가족을 해치지 않고, 또 곁의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론의 힘이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서평 쓴 배경진이 세월호 10주기 맞아 그린 그림.
타투 중에 뱃사람들이 하는 타투가 있다. 제비가 바다에 빠진 영혼을 구해 집으로 데려다 준다고 믿어서 하는 타투라고 한다.
제비가 누군가를 좋은 곳에 데려다 주길 바라며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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