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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민주화와 표상의 정치(1/2)

 

김현준(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이 글은 제3회 서교연 컨퍼런스에서 발표되었습니다. 

 

 

포스트민주주의 한국 정치의 성격은 무엇인가? 최근 우리가 겪은 사건들의 민주주의적,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은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민주주의론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인민(또는 포퓰리즘)의 표상을 헤게모니의 봉합과 균열의 부침 속에서 비판적 분석을 시도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은 포스트민주주의의 핵심적 속성인 과두적 엘리트 지배와 인민의 정치적 소외의 관계를 민주화세력과 인민과의 관계 속에서 재독해하고(1장), 인민의 정치적 소외와 정체성(들)의 출현, 그리고 그에 따른 정치적 대표/재현/위임 권력의 발생 관계를 논한다(2장). 그리고 이 표상의 문제에 민주화세대의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87체제 민주화세력 헤게모니를 부르디외의 표상/대표/재현의 정치학을 통해서 이 원리를 분석하고(3-1장), 민주당의 역사인식을 비판함으로써 ‘촛불’과 인민적 사건들의 의미를 재고한다(3-2장). 끝으로 ‘촛불’을 87체제의 정점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촛불’ 헤게모니의 균열을 야기하는 정치종교(들)을 분석하면서 이것이 87체제 포스트민주주의의 귀결이라고 주장할 것이다(4장).

 

 

1. 포스트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과두적 엘리트 지배와 정치적 소외, 그리고 포퓰리즘

 

포스트민주주의는 한 마디로 자본주의 권력에 의한 민주주의의 정치적 소외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정치적 소외는 엘리트 지배와 소극적(또는 적극적) 시민 현상이라는 경험적 현실태로서 역사적으로 나타난다.[1] 그리고 포퓰리즘은 엘리트 지배권력과 소외된 인민 사이의 관계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병리적 현상이라기보다는 민주정체의 위기나 한계를 드러내는 민주주의의 내재적 잠재성 또는 구성적 외부일 수 있다(진태원, 2017: 8 참조).

 

포스트민주주의란 민주주의냐 비민주주의냐의 이분법을 벗어나 민주화 이후, 자본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또는 자본권력의 침투를 통해서 비/반민주적 요소나 현상이 발생한 민주주의를 지칭하고, 나아가 그러한 현상이 역설적이게도 민주적 제도 속 각인을 통해서 고착/강화/재생산됨으로써 인민(주권)이 선택적으로 포함/배제되는 상황을 규정한다. 자본주의는 “현존하는 민주주의를 현실로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운동 원리를 침해하지 않는 식으로 민주주의를 형식화하고자 한다”(조희연, 2008: 222). 국가와 시장, 정치와 시장, 즉 도덕적이고 공적인 가치와 정당성 게임의 장인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본의 규칙이 지배하는 시장의 전통적 구분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크라우치, 2012/2011: 214-18 참조). 간단히 말하면 자본권력이 민주적 제도의 외피를 걸치거나 심지어 내피까지 만드는 상황인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포스트민주주의론은 실제 민주주의의 반민주적 조건을 탐구하게 된다. 우리는 이 조건이 엘리트 지배권력과 소외된 인민 사이의 관계 문제로 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포스트민주주의론은 다음과 같은 정치적 효용을 갖는다.

 

민주주의 시기 이후 지루함, 좌절, 환멸이 발생하는 상황, 강력한 소수 집단이 정치 시스템이 자신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다수인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상황, 정치 계급이 대중의 요구를 관리하고 조작할 줄 알게 된 상황, 하향식 공공 캠페인을 진행하여 사람들이 투표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상황을 기술하는 데 도움을 준다(크라우치, 2008: 32).

 

포스트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결여된 전(pre-)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제도적) 완성을 넘어선 시잔 속에서도 새로운 결여의 출현으로 민주주의의 정의와 정당성을 다시금 고민하는 현대 의회주의 민주정치와 국가의 곤란함을 설명하고자 하는 담론이기도 하다(크라우치, 2008: 32 참조). 신진욱의 표현은 이 곤란함을 잘 묘사한다. 포스트민주주의는 “‘더 나은 민주주의’라는 빛이 들어올 틈이 남아 있지 않은 오래되고 견고한 건축물 안에서 파괴적인 내파의 에너지가 퍼져가는 상황인 것이다”(2018: 65). 신진욱에 따르면, “포스트민주주의”란 민주적 제도가 형식적으로는 작동하고 넓은 의미의 민주적 가치가 보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이 거대 경제권력과 결탁하거나 그들의 압력에 굴복함으로써 점점 더 많은 사회계층이 민주주의의 실질적 정당성과 대표성을 의심하게 되”고 “민주주의가 다수 시민, 특히 사회적 약자 계층의 고통과 요구를 감지, 반영,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불신을 받”게 되는 민주주의를 지시한다. 즉 비민주적, 반민주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도 없”는 현대 선진 민주국가들의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민주주의 담론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냉소로 민주주의가 “내파”될 위험에 처해 있음을 시사한다(신진욱, 2018: 65).

 

콜린 크라우치는 그의 책 <포스트민주주의: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2008/2005)과 Post-Democracy: After the Crises(2020)에서 포스트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형식적 요소는 그대로 남아 있거나 심지어 강화되면서 정치와 정부가 점점 더 특권적인 - 특히 기업 대자본 - 엘리트의 통제권 안으로 들어가 민주적인 공공적 삶이 훼손되는 민주주의 위기 상황으로 정의했다(크라우치, 2008: 11). 또 이 시기에 신자유주의가 ‘탈진실’에 힘입어 소셜 미디어의 정보기술과 공공관리의 효율성의 형태로 시민사회의 무기력을 발생시켰다고 말한다(크라우치, 2020). 이 위기에는 대의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정당, 복지국가, 경제의 위기가 다 포함될 수 있다.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는 민주주의의 형식적 요소들이 살아남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일정한 근본적 요소들이 제거되고 그래서 민주주의 이전 시대에 특징적인 일부 요소들”이 “기업 이익의 세계화”와 “민중 이익의 파편화”로 인해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크라우치, 2008: 36-37).

 

포스트민주주의 문제틀을 보다 단순화시켜본다면, 그것은 민주정치의 공적 장과 사적 장 간의 경계 무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를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신자유주의 공모라고 보아왔다. 다시 말해, 이는 공적 가치의 정당성 게임에 민주국가와 정치적 결사체들만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종교와 같은 비정치적 조직까지 개입하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 국가는 “군주의 사유재산으로 정당화되기를 멈추고” 공적인 민주주의로서 정당화되었다(크라우치, 2012/2011: 219). 기업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통해 “윤리적 의무”가 지워지는 동시에 “도덕적 의제의 양상을 결정할 권한”을 얻고, 종교는 “여전히 공적 영역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물론 흔히 무관용적이고 편협하다)의 의미를 대표”하게 되었다(크라우치, 2012/2011: 220-21). 시장조차 지식인에 의해 개인의 이기적 선택이 공공의 복리후생 증진이라는 도덕적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되었다(크라우치, 2012/2011: 220). 이 결과, “대대적이지는 않지만 점차 공식적인 정치의 장과 나란히 가치의 충돌과 경쟁이 벌어지는 새로운 공적 공간이 생겨”나고, 이러한 “단체들은 틈새시장을 찾으려는 중소기업들처럼 지배적인 정통에 이의를 제기하며 가치를 둘러싼 충돌에 참여한다. 한편 많은 사회에서 공적 논쟁을 지배하는 것은 소수의 미디어 대기업이며, 다른 거대 기업들은 … 정당들 사이의 진지한 논쟁의 범위를 제한한다”(크라우치, 2012/2011: 222-23). 즉 “가치의 장에서 싸움”이 벌어진다(크라우치, 2012/2011: 226).[2]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민주적인 것들과 비민주적인 것들의 이 양립가능해지고 그에 따라 민주주의가 훼손된다는 것이다. 신진욱의 설명에 따르면,

 

근본문제는 대의정치가 대자본을 비롯한 사회권력에 종속되거나 밀착되어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을 보여주지 못함에 따라, 사회 내 민주주의 자체의 정당성과 수행력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나아가 현대 민주주의가 지향해온 보편주의적 가치들에 도전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소수자 혐오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신진욱, 2018: 59).

 

크라우치의 논의를 오늘날의 한국에 비춰 읽기를 시도하면서 재강조하고 싶은 것은 포스트민주주의 시기에는 민주화 이전 시기의 “규제되지 않은 사적 권력”과 포퓰리즘(들) 또는 정치종교(들)이 동시에 회귀한다는 점(크라우치, 2008: 38 참조)과 그에 따른 인민의 정치적 소외와 혐오 정동의 출현에 있다. 이를 우리의 문제상황에서 변주해본다면, 포스트민주주의의 문제는 산업화-민주화세력 지배연합과 극우/혐오 세력 및 소수자 집단의 역학 관계(포퓰리즘과 정체성 정치)를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재해석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2. 정치적 소외와 인민(들)의 재현 권력 문제

 

먼저, 인민의 정치적 소외와 정체성(들)과 포퓰리즘의 출현, 그리고 이에서 발생하는 대표/재현/위임 권력 문제에 대해 논해보자. 즉 이 장에서는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 발생하는 포퓰리즘의 실제적 귀결에 대한 크라우치의 통찰을 통해서 표상/대표/재현 권력의 정치학적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본격적인 논의는 3장).

 

크라우치의 판단은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 평등주의 운동이 점차로 무능해진다는 것이다(2008: 11). 이에 따라 포스트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정치를 엘리트의 것으로 축소하고 “고유한 의제 개발에 소극적인 대중”(크라우치, 2008: 36)이 나타난다. 이른바 ‘소극적 시민 모델’을 그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정치란 본질적으로 엘리트의 사무이며, 단지 엘리트가 일하다가 무엇을 잘못하면 그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성난 대중으로부터 비난과 질책을 받으면 된다는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소극적인 접근을 전제한다. 역설적으로 재수 없게 걸린 장관이나 공직자가 사임을 함으로써 정부의 실패나 재앙이 그럭저럭 해결됐다고 간주할 때마다, 정치란 엘리트들로 이뤄진 작은 집단이 의사 결정을 도맡아 하는 일이라는 모델을 묵인하는 셈이다(크라우치, 2008: 23).

 

이러한 “소극적인 시민”이 발생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크라우치는 기업 엘리트의 사적 권력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지적하면서, 언론출판 환경 및 정치커뮤니케이션의 변화, 그리고 정치의 시장화와 상품화(쇼 비즈니스)의 역사를 살핀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포스트민주주의의 핵심적 속성인 ‘소극적 시민 모델’이 엘리트 지배와 함께 오늘날 한국사회의 87년체제 이후 정치질서 및 역동적인 인민의 흐름과 어떻게 만나거나 헤어지는지, 또는 포함하거나 배제하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이 만남의 장소에 혐오의 정동, 반지성주의, 극우종교라는 형태의 포퓰리즘 현상(또는 증상)이 자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포퓰리즘과 소극적 시민의 특성으로 정의되는 포스트민주주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포스트민주주의는 자본 지배권력과 의회 민주주의로 인한 대중 소외의 발생이 대중의 반응(포퓰리즘)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대중의 반응은 분노나 저항의 형태를 띠거나 혐오 정동일 수도 있다. 크라우치(2019)가 예시했다시피 트럼피즘, 브렉시트, AfD는 우익 포퓰리즘의 좋은 예일 것이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대체로 극우 포퓰리즘의 발흥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치는 대표적으로 페미니즘, 환경주의, 외국인 혐오 포퓰리즘과 같은 대중운동이 “시스템에 충격을 주고 엘리트들이 더 이상 논의하지 않을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여 “민주주의가 번성”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Crouch, 2019: 126; 2003). 무페도 “포퓰리즘 계기”가 “오랜 탈정치 시기를 지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가리키”며, 이 귀환이 “자유민주주의의 제도들을 약화시키는 레임을 통해” “귄위주의적 해결의 길을 열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 가치들을 다시 확인하고 확장시킬 수도 있다”고 보았다(무페, 2019: 19).

 

크라우치 역시 2019년 논문 “포스트민주주의와 포퓰리즘”에서 포퓰리즘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고려하면서 그 역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킬 수 있고 방치된 이슈를 부각시켜 기존 정당과 정치인이 힘을 받을 수 있지만, 제도화되지 않고 존속될 경우,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지도자의 잠재적 조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민주주의에 중요한 선거는 권력자나 지도자의 권력남용을 견제하는 안전장치인데, 포퓰리즘은 이것이 취약하다. 포퓰리즘이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완벽하고 최종적인 선언으로 여기는 것이 이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그는 포퓰리즘에 대한 반대가 대의에 실패하는 정당에 대한 옹호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포퓰리즘은 민주적 제도의 제약을 받아야하고 이는 부분적으로 정당의 역할에 달려있다(Crouch, 2019: 135-36).

 

크라우치는 포퓰리즘이 세 가지 전개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주장한다(2019: 129-131). 이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첫째, ‘새로운’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새로운 운동이 등장할 때 취할 수밖에 없는 정치 양식으로 긍정될 수 있다. 불청객이 등장하지 않으면 정치적 대표성의 변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성의 낡은 대표 시스템은 불청객이 불쾌할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불청객이 이익집단이라고 낙인 찍는다. 따라서 소외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포퓰리즘이라면 정당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대중운동이 제도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거나 반대로 운동이 기성 제도 권력의 관행을 채택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포퓰리즘이 공식적 제도와 권력을 견제하고, ‘매개되지 않은’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매개한다고 주장하기에 고유의 정치 의제가 없는 플랫폼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카리스마 지도자 조직이 되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명시적으로 매개 기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적으로 신뢰 가능한 지도자라는 인간본성에 대한 순진한 믿음, 즉 카리스마에 의해 동원되는 조직이 되는 것이다. 즉 인민의 일반의지는 카리스마 지도자에게 투사되는 셈이다. 아울러 포퓰리즘은 실제 이를 자본과 권력으로 통제하는 소수 집단의 영향력에 취약하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소셜 미디어의 발전은 포퓰리즘을 순수한 이념형으로 사유하는데 난점을 야기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자원만 있다면 (즉, 매우 부유한 엘리트 집단에 속해 있다면) 다수의 개인이 자발적으로 올린 것처럼 보이는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조직된 출처에서 나온 소설 미디어 메시지를 보내는 복잡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개인 소설 미디어 사이트에 올라온 글이 한 곳에서 올라온 것보다 여러 곳에서 올라온 것으로 보이는 어떤 사건이 견해가 건전하다고 믿을 가능성이 더 높다”(Crouch, 2019: 135).[3]

 

이 경우들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매개, 대표, 대의, 표상의 요소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르디외의 대표/재현/위임의 정치학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포퓰리즘은 항상 국민을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치적 소외의 문제는 결국 대표/표상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이는 3-1에서 다룰 것이다).

 

크라우치는 민주주의의 후퇴의 원인으로서 경제 세계화와, 계급 및 종교라는 사회적 정체성의 쇠퇴, 그리고 이로 인한 네이션 정체성 강화, 즉 정체성을 위한 포용과 배제의 투쟁이 외국인 혐오 포퓰리즘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계급운동과 종교의 쇠퇴가 경제 세계화와 거대 기업 부상, 대중을 무시하는 정치 시장화와 글로벌 엘리트 현상과 결합하여 포스트민주주의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특히 포스트민주주의의 위험을 가중시키는 주요한 변수 중에 하나가 극우 포퓰리즘이다. 주지하다시피 영미권과 유럽의 선진 포스트민주사회에서 극우 행동주의 대중운동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좌절과 불신을 동원하면서 급성장했다. 이 세력들은 단지 대중행동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제도적 규칙을 구성하는 등 제도정치화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경제 세계화의 영향은 분명하지만, 계급 및 정체성의 영향은 덜 분명함에도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한 반면에 정체성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고 강력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지키거나 “우리”를 확립하기 위해 “저들”을 배제하고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계급과 종교를 둘러싼 투쟁에 기반한 정당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Crouch, 2019: 126-27 참조). 즉 포퓰리즘을 형성하는 ‘포용과 배제를 둘러싼 투쟁’에 계급과 종교 뿐만 아니라, 젠더와 네이션이 있다(Crouch, 2019: 127). 하지만 종교는 그 중요성의 감소 때문에, 계급은 산업구조와 계급구조의 변화 때문에 정치 참여의 동기로서 쇠퇴한 반면에, 이주민과 난민, 그리고 테러에 의해 위협받는 네이션 정체성에 대한 호소의 중요성은 증가했다고 말한다. 선진 북유럽 복지 국가들에서조차 나타나는 외국인 혐오 포퓰리즘이 이러한 현상을 방증한다는 것이다.[4]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신진욱도 크라우치를 따라, 좌우 포퓰리즘을 포스트민주주의의 증상으로 본다. 즉 본래 소극적인 시민들이 포스트민주주의의 문제점 때문에 좌나 우로 적극적으로 변신하는 셈이다(적극적 다중?). 기실, 글로벌 차원의 사례들도 그렇고, 87년 이후에도 한편으로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많은 대중운동들이 일어났다. 특히 촛불집회는 중요한 사례일 것이다(신진욱, 2018: 66-67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주의 대중운동들도 일어났다. 하지만 신진욱에 따르면, 이러한 좌파적 대중봉기적 사례들이 “제도정치의 권력 지형을 크게 바꾸지 못했” “오래가지 못했”지만(2018: 66), 극우 혐오 세력은 결집과 동원, 심지어 제도정치에 진입에 성공한 것처럼 묘사한다(2018: 67-68 참조).

 

그렇다면 좌파 포퓰리즘은 실패했는데 우파 포퓰리즘이 (적어도 제한적으로나마 지금은)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Crouch, 2019: 124 참조) 종교의 영향력과 종교적 정체성이 쇠퇴했다는 크라우치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보수우익개신교는 한국의 극우 포퓰리즘의 중요한 축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종교적 정체성은 혐오 정동, 극우 포퓰리즘과 분명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주지하다시피 주류 보수우익개신교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종교적 신념과 정체성에 대한 위협과 공포로 받아들이기에 공격적으로 반응한다.[5]

 

젠더 역시 강력한 사회적 정체성으로서 포퓰리즘의 동력이 된다. 내셔널리즘의 경우도 민주진영에서는 민주당을 옹호하고 보수당을 비판하기 위한 “친일적폐” 담론으로 확인이 되고, 반대로 보수진영에서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반노동(노조혐오) 관점에서 통치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각기 좌/우 포퓰리즘을 추동하는 주요한 '정치종교'적 정체성으로 보인다(이는 마치 영국 브렉시트가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의 정책이 되버린 것과도 유사하다).[6]

한국의 경우, 이 서너 가지 정체성들이 교차하고 충돌하면서 좌/우 포퓰리즘의 전선을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젠더 정체성과 내셔널리즘은 한국에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이성애중심주의, 국가주의, 발전주의가 결합된 가부장적 내셔널리즘으로 나타난다. 보수개신교 정체성은 이러한 젠더 정체성(반동성애)에 내셔널리즘(반공/신냉전주의와 발전주의)을 더하여 ‘문화전쟁(culture war)’의 극우 포퓰리즘을 시도하고 있다.

 

크라우치는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가치의 장”의 싸움에 개입하는 시민사회의 주요 행위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종교는 기업과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자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경제적 이해관계의 포로가 되기 쉽다. 이러한 위험성은 종교만이 아니라 모든 행위자에게 해당한다. 종교는 정치와 경제의 특권을 문제삼고 윤리적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가 있다(크라우치, 2012/2011: 228).   

 

오늘날 포스트세속사회는 (크라우치의 용법과 마찬가지로) 세속화(사사화)와 탈세속화(재주술화)가 혼재된 양상을 띠며 지역성을 강하게 반영한다. 즉 종교는 인간 삶의 전영역을 포괄하는 유일한 ‘성스러운 덮개’의 지위에서 하나의 분화된 영역으로 축소되었지만 개인의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그것을 믿고 체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하다. 파편화된 성스러움 종교의 사사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공적 영향력과 내셔널리즘이나 민주화세력의 정치종교적 힘은 오히려 증대되는 측면도 관찰된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내셔널리즘의 발흥에 대해 관찰했다시피, ‘성스러운 덮개’의 파편화는 새로운 성스러운 형식들을 위한 조건을 창출한다(Lynch, 2012: 17). 그리고 이 정치종교적 영향력은 신자들의 개별적 신앙실천을 통해 사회에 행사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익집단이나 정치적 결사체로서 행동함으로써(행동주의) 행사되는 것이다.

 

소외된 집단은 다양성을 상실하고 양극화된 정치(이데올로기 언어)시장과 미디어를 통해 획일화되고 과잉 공급된 담론 상품으로서의 정치적 의제에 주목하게 된다. 이 주목은 정치종교 ‘생비자’인 대중에게 단지 인지적인 효과를 넘어서 동일시의 효과를 가져온다. 특히 극우 선동가는 소외와 고통의 원인을 소수자 집단에게 전가함으로써 대의제 바깥에서 대중의 지지와 대리의 권력을 획득한다(김현준, 2021b: 267).

 

사회운동에 대한 크라우치의 견해를 통해서 포스트민주주의에서 극우 (종교) 포퓰리즘의 발생과 실천전략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크라우치의 결론은 (자유주의적) 사회운동이, 그것이 정치적이든 비정치적이든 강한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크라우치는 민주주의가 약해지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론으로 선거정치보다 자유로운 사회운동과 압력단체의 성장 현상을 고려한다. 즉 현대 사회운동들의 확산과 성장을 보면 민주주의의 퇴락으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을 진지하게 검토한다. 하지만 그는 사회운동이 민주주의가 처한 현재의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강력한 요인임을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 약점이 있다고 주장한다(2005: 24-25).

 

크라우치는 사회운동을 “정치적인 의제 추구를 그 본질로 하면서 국회의 의결과 입법 및 공공 기관의 지출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치적 사회운동단체와 정치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비정치적 사회운동단체로 구분한다(2005: 25).  이 때, 비정치적 사회운동은 민주주의 퇴락과 냉소주의의 전조다. 가령 퍼트넘의 저술들에서 중요한 ‘사회자본’은 국가나 지역정치와 무관한 비정치적 사회운동의 성장을 시사한다는 것이다(2005: 26 참조). 또 영국의 경우, 자조 단체, 공동체, 자선 단체 등의 성장은 축소된 복지국가의 결핍을 메우는 역할에 그친다는 것이다(2005: 26). 심지어 “이 단체들의 활동 중 일부는 비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번성할 수 있다”(2005: 27). 따라서 시민사회 자발적 결사체로는 민주주의 정치의 위기를 돌파하는 데 부족하다. “이 단체들은 정치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민주주의가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그 정의상 정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005: 26-27).

 

한편 정치적 사회운동은 “강력한 자유주의 사회의 증거”이지만 “강력한 민주주의의 증거는 아니다”(2005: 27).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상호의존적이지만 분명히 구별되고 긴장이 존재하며 모순되기도 한다. 그는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에 거의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로비 단체를 정치적 사회운동체의 대표적 사례로 생각한다(200: 29). “자유주의의 번영은 확실한 이슈를 관철하여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모두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어 공적인 정치 참여를 왕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무제약적 자유주의에 따른 다양한 정치참여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건강한 민주주의와의 균형을 이루지 않으며 항상 체계적인 왜곡을 낳는다”(2005: 30). 즉 이것의 문제는 규제없이 자유로운 정치 선전과 로비가 기득권 선거정치에는 이득이지만 민주주의에는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2005: 28 참조).

 

특히 그는 기업이익을 위한 로비 단체의 문제점을 대표적으로 지적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정치적 사회운동체의 문제는 한국의 포퓰리즘을 사고할 때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예컨대 개신교 극우정치세력의 정치참여는 (정치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유주의적 정치질서의 특수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제도정치 외부에서 그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는 행동을 통해서 제도정치, 선거정치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정치적 사회운동이란 기득권의 선거정치를 강화하는, 기득권 정치의 규칙을 강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포퓰리즘이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이고 구성적이며 동시에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계기를, 즉 대중의 정치참여나 대중운동을 긍정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작동하는 기본 조건이나 한계를 인식해야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공론장이 평평하지 않게 구축되어 있으며, 소유한 정치자본의 총량과 구성비에 따라 정치적 기회구조가 불평등하게 배분되었다는 점에서 인민대중의 목소리가 상이하게 ‘청각’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계속)

 

 


각주 
 

[1] 여기서 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ontological)’ 것과 ‘존재적인(ontic)’ 것의 구분을 차용했다. 포스트민주주의의 속성을 이루는 엘리트 지배와 소극적 시민은 존재적인 것, 정치적 소외는 존재론적인 것에 해당한다.  

 

[2] 크라우치는 모든 영역의 집단들이 가치와 공공성를 정의하는 정당성 게임에 참가하기에 “어떤 영역도 다른 영역을 지배하지 못하게”, “통제권을 확대하지 못하게” 해야 한고 주장한다(2012/2011: 223). 따라서 “누구도, 어떤 종교나 신념체계도 패권을 갖지 못하는, 경쟁하는 가치들의 복수성을 내포하는 사회”, “체제 전반의 성격이라는 메타 수준에서 볼 때문 도덕적 상대주의”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 크라우치의 결론이다(2012/2011: 235).

 

[3] 크라우치는 2020년 Post-Democracy After the Crises에서 좌파 포퓰리즘도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온건한 자유주의적 해법을 주장한다. 그는 포스트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국적 협력을 통한 전지주적 시스템을 조정하고 경제 과두 정치의 간섭을 줄이기 위해 ‘진정한’ 시장 경쟁 시스템으로의 복귀라는 제도적 대응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해법으로 비판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비판으로는 Gerbando(2020/5/2)를 보라.

 

[4] 한편, 민주주의 역사가 25년 밖에 되지 않은 중부 및 동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은 국가 사회주의 하에서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으로 간주했지만 실제로는 소수 당관료 엘리트만이 특권계급으로서 정치적 시민권을 가졌다. 이들 국가에서 포퓰리즘 발생의 핵심 기제는 보편적 포용으로 인한 보편적 배제에 있다(Crouch, 2019: 128). 다수 인민에게 정치적 시민권의 부재로 인한 정치적 운동(정당)들이 파편화되었고, 그로 인해 혐오와 같은 극우 의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5] 호프스태터(2017/1962) 식으로 보자면, 포퓰리즘은 평등주의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 정신 또는 시민종교의 근간을 이루는 이 평등주의는 대중봉기와 정치참여의 동력을 설명하는 동시에 반지성주의의 원인이나 조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평등주의는 복음주의 개신교라는 역사적 종교 형식 속에서 혐오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6] 정치종교란 국가나 민족, 인종과 같은 상상된 정치공동체를 그 이념(교리)과 의례를 통해 신성화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정치적 동원과 효용을 갖는 정치의 신성화, 종교화 현상을 지칭한다.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세속 이데올로기들 및 정치 지배의 ‘신성화’ 현상을 묘사하고,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 개념"이다(나인호, 2004: 383). 본래 파시즘, 나치즘, 볼셰비즘 등 전체주의 국가 정치체제의 대중적 동의와 지지(또는 대중독재), 그리고 종교적 모티브를 설명하기 위한 에릭 푀겔린의 이념형적 개념이다. 정치종교가 세속화의 진공 상태(팩스턴, 2004 참조), 즉 정치적인 것의 의미상실로 인한 정치적인 것의 회귀라는 역설적 결과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결손 또는 정치적 권리들의 은폐와 공백 속에서 정체성 정치와 포퓰리즘의 출현을 설명하는 포스트민주주의론과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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