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는 필명과 실제 이름, 시와 일기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는 아흐마토바의 초기 시를 읽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아흐마토바가 작가동맹 개인카드에 파 놓았던 네 개의 함정 중 세 번째 함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아흐마토바는 개인카드에 출생연도를 1893년이라고 적어 넣었는데요, 사실 그녀는 1889년 6월 11일(신력으로는 23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녀보다 십년 먼저 태어난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입니다. 1949년 12월 21일(신력), 스탈린의 일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아흐마토바는 다음 시를 써서 그에게 바칩니다.
21 Декабря 1949 года
Пусть миру этот день запомнится навеки, Пусть будет вечности завещан этот час. Легенда говорит о мудром человеке, Что каждого из нас от страшной смерти спас.
Ликует вся страна в лучах зари янтарной, И радости чистейшей нет преград, — И древний Самарканд, и Мурманск заполярный, И дважды Сталиным спасённый Ленинград
В день новолетия учителя и друга Песнь светлой благодарности поют, — Пускай вокруг неистовствует вьюга Или фиалки горные цветут.
И вторят городам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Всех друж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города И труженики те, которых душат узы, Но чья свободна речь и чья душа горда.
И вольно думы их летят к столице славы, К высокому Кремлю — борцу за вечный свет, Откуда в полночь гимн несётся величавый И на весь мир звучит, как помощь и привет. 21 декабря 1949
1949년 12월 21일 세계는 이 날을 영원히 기억할 지어다, 영원은 이 때를 유언으로 받들 지어다. 전설은 지혜로운 분에 대해 이야기하는구나, 우리 모두를 무서운 죽음에서 구하시었도다. 온 나라가 호박(琥珀) 빛 여명 속에 환호하는구나, 이 순결한 기쁨, 막을 것 없어라, - 저 고대의 사마르칸트, 극지의 무르만스크, 스탈린께서 두 번이나 구하신 레닌그라드. 우리의 스승, 우리의 벗께서 맞으시는 새해 모두들 빛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구나, - 눈보라는 세차게 몰아칠 지어다, 높은 산의 제비꽃은 만개할 지어다. 우애 깊은 공화국들의 도시들도 소비에트 연방의 도시들에 화답하고 우리의 산업역군들 굴레 아래 헐떡여도 그들의 말[言]은 거침없고 영혼은 당당하도다. 그들의 생각이 영광의 수도로 날아든다, 드높은 크렘린, 영원한 빛의 투사의 품으로, 한밤중 어디선가 울려오는 장엄한 찬가, 힘을 보태는 인사말처럼 온 누리에 퍼진다. 1949년 12월 21일
이 시는 주간지 <오고뇨크(Огонёк, 불꽃)>(1950년 4월 14호 20쪽)에 연작 「세계에 영광을(Слава миру)」의 다른 시들과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1899년 12월 21일(신력)에 이 잡지의 첫 호가 나왔고 2020년 12월 21일에 종이에 인쇄된 형태로는 마지막 호가 발행되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잡지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날짜도 12월 21일이고 아흐마토바가 시를 바치는 수령님의 생일도 12월 21일입니다.
스탈린 예찬으로 도배된 이 시를 아흐마토바는 장중한 6음보 약강격으로 썼는데요, 이 율격이 전통적으로 고귀함과 장엄함을 노래하는 비극과 서사시에서 쓰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스탈린이 거둔 업적을 찬미하는 시에서 아흐마토바가 이 율격을 사용한 것은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강세 있는 모음을 1, 강세 없는 모음을 0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는 이 날을 영원히 기억할 지어다(Pust’ mi|ru e|tot den’| zapo|mnitsya| nave|ki: 01 / 01 / 01 / 01 / 00 / 01)” 러시아시에서 한 행을 이루는 음절 수의 평균을 내보면 8음절(여기서 플러스 마이너스 1음절) 정도라고 합니다. 약강격의 경우 한 행에 4음보 정도가 가장 표준적으로 들리고, 6음보 이상은 매우 드뭅니다.[2]아흐마토바는 규칙적인 리듬이 이어지는 아주 긴 한 행 안에 스탈린의 공적을 열거하기도 하고 그에 대한 감사의 말을 경건하게 읊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역에서도 예스러운 말투를 써보았습니다.
사실 스탈린 찬가를 아흐마토바만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흐마토바는 혁명 전 러시아시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료 시인 네 명에게 바치는 시 「우리 넷(Нас четверо)」을 쓴 바 있는데요, 이 넷은 아흐마토바 본인을 포함하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마리나 츠베타예바, 오시프 만델시탐을 가리킵니다. 이 중에서 츠베타예바만 빼고 파스테르나크와 만델시탐도 스탈린 찬가를 썼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1936년 1월 1일자 <이즈베스티야>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긴 찬가를 실었습니다. 새해 첫날에 바치는 찬가는 거의 팡파르에 가까웠지요. 일부만 옮겨보겠습니다.
Живет не человек ― деянье: поступок ростом в шар земной. <...> Он ― то, что снилось самымы смелым, Но до него никто не смел. <...> И этим гением поступка Так поглощен другой поэт Что тяжелеет, словно губка, Любою из его примет.
인간이 아니라 ― 공적이 살아 있다: 그 행동의 키는 지구에 육박한다. <...> 그는 ― 가장 용감한 이의 꿈에 나타난다, 그가 있기 전 아무도 감히 그러하지 못했다. <...> 또 다른 시인은[3] 행동의 천재에게 그토록 압도되어 그의 모든 자취 흠뻑 들이마시고 스펀지처럼 흠씬 무거워지누나.
여기서 파스테르나크는 스탈린을 가리켜 ‘행동의 천재이자 시인’이라고 말합니다. 즉, 수령님의 행동은 곧 시가 됩니다. 이때, 수령과 시인은 “두 개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푸가(двухголосая фуга)”를 부르는데 시인은 수령의 ‘시’를 문자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파스테르나크는 훗날 이 시에서 스탈린과 관련된 부분을 삭제하여 시집 『새벽 기차를 타고(На ранних поездах)』(1943)에 수록된 연작 「예술가(Художник)」에 포함시킵니다.
한편, 만델시탐의 찬가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해 시인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몇 구절을 우리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Глазами Сталина раздвинута гора И вдаль прищурилась равнина, Как море без морщин, как завтра из вчера - До солнца борозды от плуга-исполина. <...> Для чести и любви, для воздуха и стали Есть имя славное для сильных губ чтеца. Его мы слышали, и мы его застали. январь-феварь(?) 1937
스탈린의 눈짓에 큰 산이 움직이고 저 멀리 평원이 게슴츠레 실눈을 뜬다, 주름살 없는 바다처럼, 어제에서 나온 내일처럼 - 거인의 쟁기가 일군 밭고랑은 태양에 가 닿는다. <...> 명예와 사랑, 공기와 강철에 걸 맞는 그 이름, 낭송자의 굳센 입술이 즐거이 외치는 그 이름. 우리, 그 이름 들었노라, 우리, 그 이름 영접했노라. 1937년 1-2월(?)
이 시는 1937년 작가동맹에 제출된, “스탈린에 대한 시”라는 제목을 지닌 시 묶음 중 한 편입니다. 만델시탐의 전집 주석에 따르면 1936년과 1937년에 스탈린이 주도한 일련의 정치 재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4]첫 번째 모스크바 재판은 1936년 8월에 열렸는데요,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등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트로츠키-지노비예프파 테러조직을 운영했다는 죄목으로 총살됩니다. 또, 1937년 1월에는 역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카를 라데크를 비롯해 13명이 총살됩니다. 만델시탐은 이미 1933년에 스탈린을 패러디하는 다음 시를 써서 체포된 바 있었습니다.
Мы живем, под собою не чуя страны, Наши речи за десять шагов не слышны, <...> Его толстые пальцы, как черви, жирны, И слова, как пудовые гири, верны, Тараканьи сметются усища И сияют его голенища.
우리는 두 발 아래 나라를 느끼지 못하네, 열 걸음만 벗어나면 우리 말소리 들리지 않네. <...> 그의 통통한 손가락은 애벌레처럼 기름지고, 1푸드[5] 짜리 추와 같은 그의 말소리 든든하기 그지없고, 바퀴벌레 같은 거대한 콧수염이 웃을 때면 그의 부츠 휘황찬란하도다.
감히 수령님의 손가락을 애벌레에 비유하고 콧수염을 바퀴벌레 같다고 하다니요! 파스테르나크는 만델시탐의 풍자시를 듣고 이것은 자살 행위(акт самоубийства)이니 아무한테도 읽어주지 말라고 애원했습니다.[6] 결국 만델시탐은 체포되었지만 수령님의 ‘자비’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이런 만델시탐이었으니 1936-37년 대숙청의 피바람 아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더 스탈린을 예찬하는 시를 써야 하지 않았을까요. 만델시탐은 이 시에 대해 아흐마토바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야 알겠어, 그건 몹쓸 병이었다는 걸.”[7]그러나 만델시탐은 1938년에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사망합니다.
아흐마토바의 스탈린 찬가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아흐마토바는 첫 번째 남편이었던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레프가 있었습니다. 1935년 아흐마토바의 두 번째 남편 니콜라이 푸닌과 아들 레프는 “반소비에트적 대화”를 나눴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지만 아흐마토바와 파스테르나크가 스탈린에게 탄원서를 쓴 덕분에 둘은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일은 종결되지 않은 채 남아 1949년에도 레프는 같은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결국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근방의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1956년이 되어서야 그는 모스크바를 거쳐 레닌그라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흐마토바는 두 번째로 체포된 아들 레프가 풀려나기를 기원하며 스탈린에게 시적 ‘탄원서’를 썼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도, 스탈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스탈린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아흐마토바의 시를 썩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첫째, 레프 구밀료프는 석방 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이 이 시를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반동분자’의 가족인 시인이 자신을 예찬하는 시를 잡지에 공개적으로 실었으니 이 시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았겠지요. 어쨌든 아흐마토바의 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스탈린의 사람들’, 즉 공식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시의 몇몇 구절에 딴지를 걸었습니다. 소비에트 작가동맹의 출판사인 <소비에트 작가(Советский писатель)>는 아흐마토바의 시에 대해 내부 심사를 진행했습니다. 팔라딘(А. Палладин)이라는 심사자는 “전설은 지혜로운 분에 대해 이야기한다”와 “우리의 산업역군들 굴레 아래 헐떡여도”라는 구절에 대해 “어째서 전설이라고 말하는가? 그리고 작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산업역군들을 가리키는지 밝혀주기 바란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한편, 안나 카라바예바(А. Караваева)라는 심사자는 “연방(Союза, 소유자)-굴레(узы, 우지)라는 각운은 형편없다. 또, ‘굴레 아래 헐떡여도’라는 구절은 판에 박힌 표현이다”[8]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결국 이 시는 1953년 아흐마토바의 선집 원고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셋째, 스탈린을 싫어하고 아흐마토바를 좋아하던 사람들도 이 시를 읽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스탈린에게 온갖 찬사를 바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파리에서 러시아어로 간행되던 신문 <러시아 사상(Русская мысль)>(1950년 10월 18일자)에는 이 시와 관련하여 아주 흥미로운 글이 실렸습니다. 마리야 벨로제르스카야라는 사람이 아흐마토바의 시에 대한 실망감을 담아 긴 시를 써서 보냈다고 합니다. 몇 구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어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그 시를 썼다니 / 그토록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 매혹했던 당신이, / 나는 서럽게 울고 싶었답니다!”[9]
벨로제르스카야는 1951년에 자신의 시를 확장해 「역사라는 최후의 심판(안나 아흐마토바 사건)」이라는 제목의 산문을 만들었는데요, 여기서는 실망감 보다는 아흐마토바를 이해하고 동정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전설’이라는 말에서 하나의 희망을 읽어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시에 ‘전설’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전설’, 그것은 세상에 없었던 일에 대한 허구, 또는 있었다 하더라도 전설이 말하는바 그대로는 아니었던 일에 대한 허구다.[10]
흔히 ‘전설적인’이라는 수식어는 존재했던, 혹은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강력한 무언가를 강조합니다. 전설적인 역전의 용사, 전설적인 17대1의 격투. 믿기 힘들 정도로 어마무시하고 대단한 인물이나 사건을 가리키지요. 그런데 벨로제르스카야는 ‘전설’이라는 말에서 허구적 속성을 강조합니다. <소비에트 작가>의 내부 심사자인 팔라딘은 왜 ‘전설’이라는 말을 썼냐고 아흐마토바의 시를 비판했는데요, 스탈린은 현실이므로 허구를 가리키는 ‘전설’은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여기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설’이라는 말에서 부정적 의미를 본다는 점에서 스탈린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은 한곳에서 만납니다. 하지만 스탈린을 좋아하는 사람은 수령님의 격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며 난색을 표하고 스탈린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흐마토바는 역시 우리 편이야’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아흐마토바가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예상하고 ‘전설’이라는 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설’이라는 말 외에도 약간 ‘거슬리는’ 표현이 또 하나 보입니다. 4연 3, 4행에 나오는 “우리의 산업역군들 굴레 아래 헐떡여도 / 그들의 말[言]은 거침없고 영혼은 당당하도다”라는 구절입니다. 앞의 행을 직역하면 “굴레가 숨 막히게 하는(또는 목을 조르는) 산업역군들”입니다. <소비에트 작가>의 또 다른 내부 심사자가 “굴레가 숨 막히게 한다(또는 목을 조른다)”라는 구절을 가리켜 진부한 표현이라고 평가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산업역군들이 각종 현장에서 거대한 기계와 구조물들에 둘러싸여 고생하고 있다는 뜻으로 무난히 읽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흐마토바가 왜 하필 ‘숨 막히게 하다(또는 목을 조르다)’라는 동사를 썼는지 의아합니다. 그러면서도 아흐마토바의 선배 시인인 알렉산드르 블로크가 푸시킨 서거 84주기를 맞아 「시인의 사명에 대하여(О назначении поэта)」(1921)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떠오릅니다.
푸시킨을 죽인 것은 결코 단테스의 총알이 아니었다. 공기가 없어서 그는 죽었던 것이다. <...> 평안과 자유. 이 둘은 시인이 조화로움을 자유롭게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시인에게서 평안과 자유를 빼앗아간다. 외적인 평안이 아니라 창작을 위한 평안. 생떼를 부리는 아이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주의자의 자유가 아니라 창작을 위한 자유, 비밀스러운 자유. 그렇게 시인은 들이쉬고 내쉴 것이 없어서 죽어간다. 삶이 의미를 잃은 것이다.[11]
한 마디로 시인은 숨을 쉴 수 없을 때 죽습니다. (시와 숨의 관계는 참 흥미롭습니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에서 주인공 지나이다는 공기를 정화해야 할 때 사람들에게 푸시킨의 글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블로크를 존경하고 푸시킨에게 바치는 시를 여러 편 썼던 아흐마토바가 이 구절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아흐마토바가 숨 막혀 죽어가는 시인의 형상을 염두에 두었다면 4연 3, 4행은 서로 모순적인 관계를 이룹니다. “숨(곧 창작의 자유)을 쉴 수가 없다 – 자유로운 말과 당당한 영혼”.
그렇다면 아흐마토바는 스탈린 찬가의 두 곳에 시의 1차적 의미를 폭파하는 지뢰를 심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웠지만 결국 허구인 ‘전설적인 스탈린’, 겉으로는 자유롭고 당당해 보이지만 시인에게 공기를 허락하지 않는 소비에트 연방. 그래서인지 저는 이 시가 마냥 찬가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아흐마토바가 정말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틀에 박힌 표현’을 쓴 것인지는 역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처음 발표된 <오고뇨크>지에는 문제의 구절이 담긴 4연은 빠져 있습니다.
1949년은 스탈린뿐만 아니라 아흐마토바에게도 기념일이 있는 해였습니다. 1879년에 태어난 스탈린은 칠순을 맞았고 1889년에 태어난 아흐마토바는 환갑을 맞았지요. 작가동맹 카드에 생일을 1893년이라고 적었던 아흐마토바가 1949년에 환갑을 기념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1949년 6월에 60세 생일을 축하했다고 하더라도 11월에는 아들의 체포라는 ‘생일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수령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자 아흐마토바도 수령님께 생일 ‘선물’을 바칩니다. 자신의 기념일을 망친 사람에게 바치는 선물이란 어떤 것일까요? 포장지와 리본으로 감싸놓았다 해도 받는 사람이 어딘가 꺼림칙하게 느낄, 그런 묘한 선물 아니었을까요?
위에서 읽은 시의 마지막 연에는 ‘영광의 수도’, 즉 모스크바가 나옵니다. 아흐마토바가 스탈린에게 바치는 또 다른 찬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수령께서는 독수리 같은 눈길로 / 크렘린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시었다(И Вождь орлиными очами / Увидел с высоты Кремля).” 즉, 모스크바는 수령이 거하는 도시, 모든 사회주의적 위업의 총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읽은 시에서 아흐마토바는 스탈린이 레닌그라드를 구해주었다는 데 특히 감사를 바칩니다. 남방 도시 오데사에서 태어난 아흐마토바는 북방의 베네치아, 페테르부르크를 구해주었다는 데 찬가를 바칩니다. 레닌그라드가 어떤 곳이기에 아흐마토바는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일까요? 다음 절에서는 ‘레닌그라드’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레닌그라드
*** Годовщину последнюю празднуй — Ты пойми, что сегодня точь-в-точь Нашей первой зимы — той, алмазной — Повторяется снежная ночь. Пар валит из-под царских конюшен, Погружается Мойка во тьму, Свет луны как нарочно, притушен, И куда мы идем — не пойму. Меж гробницами внука и деда Заблудился взъерошенный сад. Из тюремного вынырнув бреда, Фонари погребально горят. В грозных айсбергах Марсово поле, И Лебяжья лежит в хрусталях... Чья с моею сравняется доля, Если в сердце веселье и страх. И трепещет, как дивная птица, Голос твой у меня над плечом. И, внезапным согретый лучом, Снежный прах так тепло серебрится. 9-10 июля 1939
*** 마지막 기념일을 축하하라— 알겠는가, 우리의 첫 겨울, 다이아몬드로 빛나던 그 겨울을 닮은 오늘 눈 내리는 밤이 되풀이된다. 차르의 마구간에서 김이 새어 나오고, 모이카가 어둠 속에 가라앉는다, 달은 일부러 그런 듯 빛을 죽이고 우리 어디로 가는지—나는 모른다. 손자와 조부의 영묘(靈廟) 사이 어수선한 정원은 길을 잃었다. 감옥의 망상 위로 떠오른 가로등은 장례라도 치르듯 타오른다. 잔혹한 빙산에 갇힌 마르스 광장, 레뱌즈야 수로는 수정(水晶) 아래 누웠고... 그 어떤 운명 내 것에 비할까, 가슴 속 기쁨과 두려움 있는데. 기적의 새처럼 몸을 떤다, 내 어깨에 올라탄 너의 목소리. 뜻밖의 빛줄기에 데워진 눈[雪]의 유해는 따뜻한 은빛. 1939년 7월 9-10일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특별한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레닌그라드 곳곳의 지명들이 나오는구나, 기념일은 반복되는 것인데 왜 마지막이라고 말할까 등의 질문만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역시 ‘알고 보니’ 이 시의 곳곳에도 함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전집의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습니다. 1930년대 아흐마토바는 병리해부학자인 블라디미르 게오르기예비치 가르신(В.Г. Гаршин, 1887-1956)과 가깝게 지냈고 그는 히틀러의 침략으로 봉쇄된 레닌그라드에서 아흐마토바에게 청혼했습니다. 시인은 1939년에 이 시를 써서 가르신에게 바쳤습니다. 아흐마토바는 1941년 타슈켄트로 피난 가서 1944년이 되어서야 레닌그라드로 돌아왔는데 그 뒤 두 사람의 관계는 끊겼습니다. 그녀는 이 시의 연도를 1938년으로 바꾸었고 1938년에 헤어진 전 남편인 니콜라이 푸닌에게 바치는 것으로 고쳤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원래는 첫 구절이 “즐거운 기념일을 축하하라”였다고 합니다.[12]그렇게 본다면 한창 사귀고 있던 가르신과의 기념일을 축하하자는 의미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푸닌에게 바치는 시가 되면서 “마지막 기념일을 축하하라”로 바뀐 것입니다.
저는 페테르부르크의 지리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이 시가 잘 읽히지 않은 지도 모릅니다. 페테르부르크를 잘 알고 사랑하는 분이 시를 본다면 머릿속으로 지도가 그려지겠지요. 구글 지도의 도움으로 시에서 나오는 장소들을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차르의 마구간’은 여름궁전이 위치한 근교 페테르고프에 있습니다. 그런데 모이카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작은 강입니다. 도심에 있는 황제의 마구간을 찾아보니 정말로 모이카 강변에 한 구역을 온전히 차지하는 거대한 마구간이 있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손자와 조부의 영묘 사이’에서 길을 잃은 ‘어수선한 정원’입니다. 여기서 손자는 1881년 3월 1일 살해당한 알렉산드르 2세를 가리킵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자리에는 그 유명한 ‘피의 구세주 사원’이 세워졌지요. 황제의 마구간에서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건너면 오른편에 이 ‘피의 구세주 사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손자의 영묘가 되겠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파벨 1세 역시 1801년에 살해 되었는데요, 그 장소는 바로 인제네르니 성(Инженерный замок, 엔지니어의 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미하일롭스키 성(Михаиловский замок)입니다. ‘피의 구세주 사원’ 뒤에 있는 미하일롭스키 정원을 가로지르면 미하일롭스키 성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미하일롭스키 정원이 ‘손자와 조부의 영묘 사이에서’ 길을 잃은 정원입니다. 지도를 보니 기하학적인 산책로를 지닌 다른 정원들에 비해서 산책로가 정말 복잡합니다. “어수선한 정원은 길을 잃었다.”
이제 미하일롭스키 정원에서 보이는 감옥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길을 잃고 맙니다. 근처에 감옥이 세 곳이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장 가까운 곳은 미하일롭스키 성에서 넵스키 대로 방향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사도바야 거리 3번지의 가웁트바흐타(Гауптвахта), 즉 중앙경비사령부입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시설로 중앙경비대를 뜻하는 독일어 ‘하웁트바헤(Hauptwache)’에서 이름을 가져왔는데요, 장교들을 집어넣는 영창으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시인 레르몬토프는 프랑스 공사에른스트 드 바랑트와 결투한 죄로 1840년 이곳에 갇힌 바 있습니다. 이때, 그는 감옥에서 자주 본, 간수의 딸에게 바치는 시 「이웃여자」를 썼다고 합니다.[13]
Не дождаться мне, видно, свободы!... А тюремные дни будто годы; И окно высоко над землей! А у двери стоит часовой! <...> Избери только ночь потемнее, Да отцу дай вина похмельнее, Да повесь, чтобы ведать я мог, На окно полосатый платок.
결코 다시 보지 못하리, 자유여!... 여러 해와 같은 감옥의 나날, 손도 안 닿는 곳에 난 들창! 문가를 지키는 보초! <...> 밤이 가장 새카만 날을 골라 아버지에게 독한 포도주를 먹이고 부디 내가 알 수 있도록 들창에 줄무늬 머릿수건을 걸어다오.
만약 반대로 미하일롭스키 성에서 네바 강 쪽으로 올라가 레뱌즈야 수로를 오른쪽에 끼고 있는 마르스 광장에서 감옥을 본 것이라면 네바 강 너머 두 개의 감옥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왼편으로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자리한 트루베츠코이 바스티온 감옥이 보입니다. 둘째, 오른쪽 멀리로는 크레스티 감옥이 보입니다. 지금까지 헤맨 곳들을 방향에 따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빨간색 화살표는 시적 화자의 이동경로, 파란색 화살표는 시선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네바 강 너머의 감옥들은 멀어서 마르스 광장에서도 잘 보이지 않을 듯합니다.
시적 화자는 눈 내리는 겨울밤에 어째서 도시를 방황하고 있을까요? 시적 화자는‘마지막 기념일’이라는 한 가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기념일에 마지막이 있을까요? 매년 같은 날에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정한 날이 기념일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기념일,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기념일만큼 서글픈 것은 없겠지요.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는 뜻이니까요. 이렇게 보면 ‘마지막 기념일’은 모순적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 때문에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선포로 읽힙니다. 그런데 ‘기념일’이라는 말 때문에 어쨌든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하는 괴이한 날입니다. “마지막 기념일을 축하하라”라는 시적 화자의 첫 마디를 곱씹어 보면 입에 쓴맛이 돕니다.
‘마지막 기념일’을 위해 시적 화자는 희미한 달빛 아래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도시를 걷습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마주치는 것들은 모두 죽음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차르들은 죽고 없지만 말들이 여전히 뜨거운 숨을 내뿜는 마굿간, 어둠 속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 모이카, 손자와 조부의 무덤, 장송곡을 부르는 듯한 가로등, 시체처럼 얼음 아래 누워 있는 광장과 수로. 어두운 이미지들 때문에 4연 마지막의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제법 이해할 만합니다. “가슴 속 기쁨과 두려움 있는데.” 그런데 왜 두려움과 함께 ‘기쁨’도 있는 것일까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의 결합은 시의 마지막에서도 다시 나옵니다. “뜻밖의 빛줄기에 데워진 / 눈[雪]의 유해는 따뜻한 은빛.” 무언가 사그라지던 것이 '뜻밖의 빛줄기'에 데워지면 다시 생명력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눈송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눈송이는 빛을 받으면 오히려 녹아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기대되던 생명력은 “눈의 유해”라는 차가운 이미지 때문에 기각됩니다. 그런데 그 유해가 또 ‘따뜻이’ 빛난다고 합니다. 기대되던 차가움은 ‘따뜻한’이라는 말 때문에 기각됩니다. 그런데 기대되던 따뜻함은 차가움을 연상시키는 ‘은빛’이라는 말 때문에 기각됩니다. 기각하고 기각되는, 상반된 이미지들의 유해는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 쌓여갑니다.
이처럼 아흐마토바의 시는 두 가지 ‘길 잃음’을 십분 활용합니다. “우리 어디로 가는지 – 나는 모른다”라는 말처럼 화자는 마음 높고 길을 잃습니다. 읽는 사람도 화자를 따라 페테르부르크 곳곳을 헤매다 보면 상반된 감정들과 이미지들 사이에서 길을 잃습니다. 페테르부르크의 산책자라고나 할까요? 산보를 하는 사람에게는 딱히 정해진 출발지도 종착지도 없습니다. 시공간적으로 걷기를 시작하는 지점과 끝내는 지점은 있지만 이 걷기는 실제적인 목적을 지니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몸도 마음도 흐트러뜨리고[散] 길을 걷는 것이지요.
이 시에서 자유분방한 산책자가 거니는 곳은 혁명 전의 페테르부르크입니다. 그런데 혁명 후의 레닌그라드에서도 어느 정도 ‘산책’이 가능했던 모양입니다. 스탈린 숙청이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 후반에 혁명 전의 페테르부르크를 시의 소재뿐만 아니라 감정의 풍경으로까지 활용했으니 말입니다. 그 까닭은 모스크바의 중앙권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레닌그라드의 특수성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시를 두고 「기념일답지 않은 생각들」이라는 수필을 쓴 시인 올레크 유리예프에 따르면, 모스크바의 예술가들은 혁명 이후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문화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며” “모든 위대한 격동이 지닌 현실성, 유일성, 그 강력함과 합법성을 절대적으로 믿으려 했다고” 합니다. 반면, 레닌그라드의 작가들은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혁명 전에 세워진 권위들의 체계를 보존하며 새로운 예술적 현상들을 만들어낼 수”[14]있었습니다.
레닌그라드 문화계의 분위기는 1946년 급격하게 변합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아흐마토바와 조셴코의 반민중적인 작품들을 실었다는 이유로 잡지 <레닌그라드>와 <즈베즈다>를 폐간합니다. 그 까닭을 주장하는 발표문에서 그는 혁명 전 페테르부르크의 퇴폐적인 귀족 문화를 답습한다며 아흐마토바를 비난합니다. “그녀는 수녀도 아니고 탕녀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도와 음행을 뒤섞어놓은 탕녀이자 수녀이다.”[15]또, 즈다노프는 레닌그라드의 “훌륭한 전통”, 19세기 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했던 “혁명적 민주주의자들, 즉 벨린스키, 도브롤류보프, 체르니솁스키, 살티코프-셰드린”[16]의 전통을 계승하고 소비에트 인민의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대한 아흐마토바와 즈다노프의 상반된 태도가 뚜렷해집니다. 아흐마토바에게는 페테르부르크가 마음 놓고 길을 잃을 수 있는 곳이라면, 즈다노프에게 레닌그라드는 뚜렷한 출발지와 종착지를 지닌 곳, 잘 다져진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즉, 전후의 레닌그라드에서 산책은 사치이므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모스크바를 산책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러브 오브 시베리아’라고 알려진 영화 <시베리아의 이발사>를 만든 감독 니키타 미할코프는 스무 살 때 영화 <나는 모스크바를 거니네>(1964)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은 바 있습니다. 산뜻한 외모의 젊은 작가 지망생 볼로댜는 모스크바 여기저기를 살랑살랑 다니며 수도에 올라온 여행객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소련의 수도가 거두고 있는 경제적 성과와 인민의 행복을 봅니다. 이처럼 인물들의 시선은 산책자의 것과 비슷하지만 영화는 결국 사회주의 대국의 영광이라는 종착지를 향합니다. 볼로댜의 산책은 팡파르를 울리는 기념일을 맞아 활기찬 도시의 발전상을 구경하고 감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흐마토바의 ‘산책’은 “가슴 속 기쁨과 두려움”을 품은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발을 옮기는 것입니다. 장송곡이라도 불러야 할 것 같은 ‘마지막’ 기념일에 앞으로 기념하지 않을 것들을 어수선하게 둘러보는 것입니다.
올레크 유리예프는 아흐마토바를 가리켜 페테르부르크의 genius loci[17]이라고 부릅니다.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정확한 뜻은 알지 못해서 검색해 보니 특정한 장소를 수호하는 정령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흐마토바도 자신을 genius loci로 파악한 듯 시 「우리 넷」에서 스스로를 가리켜 ‘정령’이라고 말합니다.
...И отступилась я здесь от всего, От земного всякого блага. Духом, хранителем «места сего» Стала лесная коряга.
...여기 나는 모든 것에서 물러섰다, 세상 모든 복락에서. 구불구불한 나무 그루터기는 ‘이 곳’의 수호 정령이 되었다.
‘이 곳’은 구체적으로 페테르부르크를 가리킬 수도 있고, 마음 놓고 길을 잃을 수 있는 산책의 공간을 가리킬 수도 있겠습니다. “구불구불한 나무 그루터기” 아흐마토바는 ‘나는 이곳을 지킨다’라고 외치지 않고 바닥을 전전하며(스탈린 찬가를 쓴 것도 나름 바닥을 기었던 것 아닐까요?) 넓게 퍼져나갔습니다. 바로 그 덕분에 아흐마토바는 레닌그라드의 언더그라운드 시인들이 시를 쓸 수 있는 공간을 지켜주었습니다. 시인 드미트리 보비셰프는 아흐마토바에게 바치는 시 「모두 넷(Все четверо)」에서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시인들을 ‘아흐마토바의 고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아나톨리 나이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흐마토바는 <...> 우리에게 시 자체도, 시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도 가르치지 않았다. <...> 그녀는 다만 공기의 특정 성분이 담긴 분위기를 만들었을 뿐이었다.[18]
다시 공기의 모티프가 나옵니다. “들이쉬고 내쉴 것이 없”을 때 시인은 죽어간다는 블로크의 말을 떠올려 보면 아흐마토바는 각종 계획과 일정들로 빼곡한 사회주의 대국의 발전 일로에서 시를 쓸 모퉁이를 찾지 못했던 시인들에게 “들이쉬고 내쉴 것”을 만들어 준 모양입니다. 러시아어로 공기는 ‘보즈두흐’이고 정령은 ‘두흐’입니다. 그녀는 시인들에게 ‘보즈두흐’를 주었기에 시라는 공간의 ‘두흐’로서 자격이 충분해 보입니다.
아흐마토바가 작가동맹 개인카드에 네 가지 전기적 함정들을 파 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참 아이러니합니다. 소련 작가동맹 측은 사회주의 업적을 위한 진실한 일꾼을 필요로 했으므로 실제 인간으로서의 작가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흐마토바는 “공기의 특정 성분이 담긴 분위기”를 스스로에게 만들기 위해 몇 가지 거짓들을 적어놓았습니다. 1964년 '아흐마토바의 고아들' 중 한 사람인 이오시프 브롯스키가 ‘무위도식자’라는 죄명으로 법정에 서고 5년의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자 아흐마토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빨간 머리에게 얼마나 대단한 전기를 만들어주고 있는지!”[19]아흐마토바는 스스로 전기를 만들었지만 브롯스키는 어쩌다 보니 전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아주 진지한 반체제 예술가의 이미지를 얻었습니다. 다음번에는 '빨간 머리' 브롯스키가 장난꾸러기시절에 쓴 시들, 선배들을 패러디하는 시들을 몇 편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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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지난해 6월 읻다에서 출간된 후아나 비뇨치의 시집 『세상의 법, 당신의 법』(구유 옮김)에는 아흐마토바의 시 「메아리」의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시를 쓰는 비뇨치는 아흐마토바 시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구유 씨는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아흐마토바의 시를 우리말로 번역해 실었습니다. 다음은 제가 이 시를 러시아어에서 옮긴 것입니다. 러시아어에서 이탈리아어로, 이탈리아어에서 우리말로 넘어온 이 시의 모험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비뇨치는 왜 스페인어 번역본이 아니라 하필 이탈리아어 번역본을 실었던 것일까요?
ЭХО В прошлое давно пути закрыты, И на что мне прошлое теперь? Что там? - окровавленные плиты, Или замурованная дверь, Или эхо, что еще не может Замолчать, хотя я так прошу... С этим эхом приключилось то же, Что и с тем, что в сердце я ношу. 1960
메아리 과거로 가는 길은 가로막힌 지 오래, 이제 와서 내게 과거란 다 무엇이냐? 거기 무엇이 있길래? - 피로 얼룩진 비석들, 아니면 돌무더기로 메워버린 문, 아니면 메아리, 내 그토록 애원해도 그칠 줄 모르는 메아리... 내 가슴 속 지닌 것에 일어난 일이 메아리에게도 일어나고야 말았다. 1960
PS2.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 모스크바에서 아흐마토바 편을 쓰기 시작했고 일년 넘게 서울에 있었습니다. 코로나고 뭐고 다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모스크바에 막 돌아왔고 이제서야 글을 마무리합니다. 서울은 “공기의 특정 성분”이 달라서 글을 쓰지 못 했다고 변명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1] Unbegaun B.O. Russian Versification. Oxford, 1963. P. 19. цит. по: Гальди Л. Александрийский стих Лермонтова // Studia Slavica Hung. XIV. 1968. C. 157.
[2] Гаспаров М.Л. Русский стих начала ХХ века в комментариях. М., 2001. С. 113.
[3] 열한권짜리 파스테르나크의 전집에서는 편집자가 “другой, поэт”, 즉 “다른 이, 시인은”이라고 쉼표를 넣어 수령과 시인을 서로 대립되는 존재로 강조하지만 이 시가 실린 1936. 01.01.자 <이즈베스티야>를 확인해 보면 쉼표가 없다. 따라서 수령은 ‘행동의 시인’이 되고 시인은 그의 자취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말의 시인’이 된다.
[4] Комментарии // Мандельштам О.Э.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и писем: В 3 т. М.: Прогресс-Плеяда, 2009. Т. 1. С. 690.
[5] 러시아의 무게 단위로 1푸드는 약 16.38킬로그램이다.
[6] Заметки о пересечении биографий Осипа Мандельштама и Бориса Пастернака // Память. Исторический сборник. Вып. 4. Париж, 1981. С. 316.
[7] Ахматова А.А. Листки из дневника // Вопр. лит. 1989. № 2. С. 206. цит. по: Там же.
[8] Королева Н.В. Комментарии // Ахматова А.А.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6 т. Т. 2. Кн. 1. М.: Эллис Лак, 1999. С. 528.
[9]Тименчик Р. К биографии Ахматовой // Минувшее. Исторический альманах. 21. СПб.: Atheneum; Феникс, 1997. С. 512.
[10] Бахметьевский архив Колумбийск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box 1, P. 141. цит. по: Королева Н.В. Комментарии. С. 531.
[11]Блок А.А. О назначении поэта // Блок А.А. Соб. соч. Т. 6. М.: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издательств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й литературы, 1962. С. 168.
[12]Королева Н.В. Комментарии // Ахматова А.А.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6 т. Т. 1. С. 912-913.
[13] Комментарий к стихотворению № 387 // Лермнотов М.Ю. Пол. собр. соч.: В 4 т. Т. 1. 2-е, электронное издание, исправленное и дополненное / Пушкинский дом; РВБ: 2020-2021. URL: https://rvb.ru/19vek/lermontov/ss4/toc.html [Дата обращения: 17. 05. 2021]
[14] Юрьев О. Неюбилейные мысли // Ленинградская хрестоматия (от переименования до переименования). Маленькая антология великих ленинградских стихов / сост. О. Юрьев. СПб.: Издательство Ивана Лимбаха,2019. С. 18, 19.
[15] Жданов А. Доклад о журналах “Звезда” и “Ленинград”. Госполитиздат, 1952. С. 9-10.
[16] Там же. С. 20.
[17] Юрьев О. Неюбилейные мысли // Ленинградская хрестоматия (от переименования до переименования). Маленькая антология великих ленинградских стихов / сост. О. Юрьев. СПб.: Издательство Ивана Лимбаха,2019. С. 23.
[18] Полухина В. Бродский глазами современников. Сб-к интервью. СПб.: Журнал “Звезда”, 1997. С. 38.
[19] Найман А.Г. Рассказы о Анне Ахматовой. М.: Художественная литература, 1098. С.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