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미하일 쿠즈민의 <날개>와 러시아 퀴어 문학 (2)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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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레르몬토프(1814-1841)

 

19세기 초반 러시아 문학에서 동성애가 다루어지는 더 흥미로운 작품은 바로 레르몬토프의 시 두 편입니다. 하나는 <화장실에 바치는 송가>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린 <티젠가우젠에게>입니다

 

 

티젠가우젠에게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지 말라,

앙증맞고 동그란 엉덩이 흔들지 말라,

욕정과 악덕에 빠져

제멋대로 장난치지 말라.

남의 침상에 기어들지도 말고

제 침상에 들이지도 말라.

농을 부리지도 말고

부드러운 두 손 꼭 쥐지도 말라.

명심하라, 나의 아름다운 핀란드 소년아,

젊음은 오래 빛나지 않으리라,

만날 때마다 애인이

십 루블씩 쥐어준다 하여도.

명심하라, 주의 손이 네 위에

권능을 떨치는 날,

오늘 네 다리 밑에서

애원하는 모든 이들,

그 달콤하고 촉촉한 입맞춤도

너의 슬픔 거두지 못하리라,

그 좆 대가리 위하여

네 생명 바친다 하여도.

 

                                1834(?)

 

 

당시 귀족 사관생도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꽤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레르몬토프도 기숙사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또 친구인 표트르 티젠가우젠의 생활을 보면서 시를 썼을 것입니다. 근엄하게 도덕적 충고를 하는 듯 하지만 마지막 구절들이 아주 유머러스합니다. 나중에 티젠가우젠은 결국 ‘방탕한 행실’이라는 명목으로 레르몬토프와 함께 복무하던 그로드넨스키 경기병 연대에서 쫓겨납니다. (카를린스키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군에서만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티젠가우젠이 쫓겨난 원인이 된, 그의 연인은 바로 러시아에서 최초로 천연가스 시추방법을 발명한 아르달리온 노보실체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들은 레르몬토프 생전에 발표된 적은 없고 1879년 제네바에서 출간된 <Eros Russe. 부인들은 모를 러시아 에로티카>라는 러시아 시선집에 수록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서문이 재미있어서 나누어 드린 자료에 옮겨놓았으니 나중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남색педерастия은 러시아에서 꽃을 피웠다. 이반 뇌제, 표트르 대제, 표트르 2세도 이 죄를 즐겼고 다른 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사교계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법에 따르자면, 남자끼리 동침하는 것мужеложество은 신의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법이 적용된 적은 거의 없다. 러시아에서는 남자끼리 동침했다 하여 사형을 당한 적이 없다. 한편,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18세기에도 사형이 심심치 않게 선고되었다. 이 시들의 주인공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여기에 묘사되는 장난들은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즐겼던 것들이다. 지금도 이 장난은 계속 되고 있다. 우리의 가장 뛰어난 시인들인 푸시킨, 그리보예도프, 레르몬토프도 남자들끼리의 동성애를 그린 시를 쓴 바 있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문학에서 이라는 주제는 터부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현대 작가 블라디미르 소로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러시아 문학에서 몸이 나오는 장면은 정말 얼마 없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주인공들의 몸을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미시킨 공작의 체형은 어땠는지 나스타샤 필리포브나의 가슴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러시아 문학을 육체성으로 가득 채우길 바랐다. 땀 냄새, 근육의 움직임, 배설물, 정액, 똥 등등. 아르토가 말했듯 똥 냄새가 풍기는 곳에 삶의 냄새가 풍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즐겨 읽으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 불륜을 그리는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품인데 정사 장면이 없습니다. 동성애 모티프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래도 몇몇 학자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동성애자로 보이는 인물들을 분석하기도 합니다. <백치>의 미시킨과 로고진, <네토치카 네즈바노바>의 네토치카와 카탸,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스메라댜코프 등등. 톨스토이의 경우, 젊은 시절 남자에 대한 사랑을 일기에 적기도 합니다. 스스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던 톨스토이는 남자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예찬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남자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한편, 나이가 들어서 쓴 <안나 카레니나>에서 연인 관계로 보이는 장교들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브론스키가 이들을 피하는 방식으로, 즉 부정적으로 그려집니다.

 

 

콘스탄틴 레온티예프(1831-1391)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만 떠올리지만 이 시기 군소 작가들이 번역되지 않아서 그렇지 면면이 아주 다채롭습니다.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 소개할 사람은 둘인데요, 첫 번째는 보수주의 철학자인 콘스탄틴 레온티예프입니다. 레온티예프는 서유럽의 자유주의를 철저하게 배척하고 러시아 정교가 그리스 전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비잔틴주의를 주장했고 말년에는 정교회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가 동성애를 다루는 단편소설 <하미드와 마놀리>를 썼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를 배경으로 터키 상인 하미드가 잘 생긴 그리스 청년 마놀리에게 반해 함께 살지만 정치적 갈등 때문에 파멸한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소설에서 동성애가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그려지지도 않습니다. 식민통치의 상황에서 일어난 비극으로 그려집니다. 심지어 하미드와 마놀리는 대단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19세기 리얼리즘 문학을 떠올려보았을 때 동성애라는 주제를 역사적 배경과 엮어 그렸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두 번째로 소개할 사람은 한때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연인이기도 했던 알렉세이 아푸흐틴입니다. 차이콥스키는 그의 시 여섯 편으로 로망스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 한 편을 읽어보겠습니다. 

 

 

알렉세이 아푸흐틴(1840-1893)

 

***

매수하는 이들의 품에 안겨 숨죽인 채

핏속에 타오르는 불을 꺼트릴 때, 너는

사랑이 무심코 내뱉은 말들을 얼마나 부끄러워하려나,

       사악한 밤이 귀띔해준 그 말들!

너는 하루 종일 정신을 놓은 채 길을 헤매고

       그 추억은 너를 짓누르고

       삶은 햇빛 하나 없는 가을날처럼

빛깔을 잃고 텅 빈 것이 된다.

허나 믿으라, 때가 왔도다! 발걸음 소리 죽인 채

아무도 부르지 않은 사랑이 너의 조용한 집에 들어와

너의 날들을 더없는 기쁨과 눈물로 채우면

너는 이제 영웅이요... 노예이니.

가혹한 운명의 누름돌도 두렵지 않고,

무거운 족쇄도, 세인의 속된 지탄도 두렵지 않으리...

너는 오직 정겨운 그 한 마디, 사려 깊은 두 눈의

사랑스럽고 선량한, 그 눈길을 위하여 생을 바치라.

 

 

나눠드린 아푸흐틴의 시에서도 동성애 모티프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만 몇몇 구절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론적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이 비슷한 레르몬토프의 시와 비교해 보면 이 시의 특징이 더 두드러집니다. <티젠가우젠에게>에서 생명을 바치는 대상이 섹스인 반면, 아푸흐틴의 시에서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이성애인지 동성애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무거운 족쇄도, 세인의 속된 지탄도 두렵지 않으리...”라는 구절로 미루어보아 정상사회에서 축복받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퀴어의 사랑을 다룬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는 없지만 대략 개인의 성적 쾌락에서 존재론적 의미로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류드밀라 빌키나의 시집 <나의 정원>(1906)

 

1831년생인 레온티예프, 1840년생인 아푸흐틴 다음 세대가 바로 1872년생인 쿠즈민의 세대입니다. 이런 바탕에서 저는 <날개>를 이해해 보고자 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있다가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쿠즈민의 동시대인 얘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여성의 사랑은 그려진 경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때, 혜성 같이 등장한 사람들이 바로 리디야 지노비예바-안니발, 예브도키야 나그롯츠카야, 소피야 파르노크, 마리나 츠베타예바 등입니다. 옮긴이의 글에서 언급한 지노비예바-안니발에 대한 이야기는 쿠즈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같이 하겠습니다. 츠베타예바가 양성애자였다는 사실은 <끝의 시>의 역자 후기에도 적었고 <소네치카 이야기>, 그러니까 소피야 골리데이라는 배우를 사랑했던 이야기는 작년에 진부책방에서도 한 적 있어서 넘어가겠습니다. 오늘은 츠베타예바와 뜨겁게 사랑했던 파르노크의 시 한 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파르노크와 츠베타예바

 

***  

                        마리나 바라노비치에게

 

, 다리가 길고 젊은 여자여!

기적이 빚어낸 듯 날개 솟는 몸이여!

슬픔에 멍해진 마음을

힘겹게 질질 끌고 다니는구나!

 

, 회오리치는 밤과 갈라진 얼음을 돌파하는

마음의 걸음걸이가 참으로 익숙하고,

어딘지 모를 생의 심연에서

웅얼거리며 올라오는 목소리도 귀에 익다.

 

그 밝은 두 눈의 어둠을 기억한다.

네 앞에서처럼 모두 목소리를 낮추면,

무아지경에 빠진 그녀는

시를 토해내며 우리를 사로잡았다.

 

너를 보면 어째서 그녀가 떠오를까!

장밋빛인 듯 금빛인 듯

진주인 듯 비단인 듯 알 수 없는 그 얼굴,

약동하는 그 열기...

 

뱀과 같이 영악하고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그 서늘함... 하지만 나는 그녀를 용서했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통하여, 마리나여,

너와 이름이 같은 여자의 환영을 사랑한다!

 

                                                 1929년 가을

 

 

파르노크의 시 몇 편이 큐큐에서 나온 퀴어시선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나눠드린 시는 거기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정말 흥미로운 것은 1929, 그러니까 이미 십년도 전에 헤어졌던 마리나 츠베타예바를 다시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친구(?!)인 마리나 바라노비치에게 바치는 시에서 말이죠. 바라노비치에게 바치는 시에서 츠베타예바를 그리워합니다. 바라노비치는 기분이 좋았을까요, 나빴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츠베타예바가 파르노크에게 바치는 연작시 <여자친구>를 썼던 것과 겹쳐서 읽어보면, 두 사람이 좋지 않게 헤어졌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 시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읽힙니다.

 

---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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