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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쿠즈민의 <날개>와 러시아 퀴어 문학 (4)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소비에트 붕괴 후 1990년대에 새로 출간된 쿠즈민의 <날개>의 표지

 

2. 쿠즈민의 <날개>: 집과 몸

 

사실 오늘 <날개>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날개>가 어떤 역사적, 지리적 맥락에 놓여있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퀴어 문학 일천년을 훑고서 <날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번역하면서 제목이 참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우선 원문은 날개들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임팩트가 부족한 것 같아서 날개로 했습니다. 그러자니 이상의 <날개>와 겹쳐서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계 최초로 동성애 주제를 다룬 영화의 이름도 날개였습니다. 바로 스웨덴 영화감독인 모리츠 스틸러의 무성영화 <날개> (1916)입니다. 쿠즈민의 소설보다 십 년 늦게 세상에 나왔지요. 유명한 조각가가 이카로스의 조각상을 만드는 데 한참 어린 연인 미카엘을 모델로 쓰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미카엘은 러시아 귀족처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나이든 연인이 준 이카로스 조각상을 팝니다. 결국 조각가는 비극적으로 죽고 미카엘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주는데요, 사실 필름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아서 저도 이 영화를 유튜브에서 부분적으로만 봤습니다. 덴마크 작가 헤르만 방의 1902년 소설 <미카엘>을 영화로 만든 것으로, 방도 게이, 스틸러도 게이, 배우들도 게이이거나 바이섹슈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쿠즈민의 <날개>와 스틸러의 <날개>는 동성애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플롯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스틸러의 경우 나이든 조각가와 젊은 모델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배신이 다루어진다면 쿠즈민의 경우에도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커플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둘은 동성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결코 동성애자라서 비극을 겪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몸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존의 사회적 배경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만듭니다.

 

쿠즈민의 <날개>가 지닌 이러한 독특함은 같은 해에 출간된 러시아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 리디야 지노비예바-안니발의 <서른셋의 괴물>과 비교했을 때도 도드라집니다. 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은 레즈비언인 화자가 연인 베라와 함께 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화자와 베라는 서로의 아름다움에 심취합니다. 베라는 자신의 연인의 아름다움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서른 세 폭의 초상화를 그리자고 하는데요, 막상 그 결과물을 보니 베라는 자신이 박제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연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베라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합니다. 지노비예바-안니발의 작품에서도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비극을 가져온다기보다는 아름다움을 박제하려는 무모한 시도가 두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한편, 쿠즈민의 바냐와 시트루프는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고정시키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내맡긴 채 만끽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러시아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을 쓴 리디야 지노비예바-안니발(1866-1907)

 

 

저는 이 지점에 쿠즈민의 <날개>가 지닌 모종의 정치적 함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 퀴어 문학 천년 역사에서 동성애는 레르몬토프에게서처럼 쾌락주의적 에로스로만 해석되거나 푸시킨과 레온티예프에게서처럼 이국적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니면 아푸흐틴에게서처럼 운명의 누름돌이거나 세인의 속된 지탄을 견디는 일입니다. 반면, 쿠즈민의 바냐는 동성애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서 벗어나 주어진 몸 그 자체에서부터 정체성을 사유합니다.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듯 집을 영원히 상실한 바냐는 고정된 공간으로서 집으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영원히 이동하는 집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이때, 몸에 대한 인식이 물놀이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소설 <날개>에서도 그렇고 퀴어시선집에 수록된 시 <물놀이>에서도 그렇습니다. , 여기 보여드리는 쿠지마 페트로프-보드킨의 그림 두 점도 소년들의 몸이 대단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올해 여름, <날개>의 출간을 준비하면서 최성경 대표님과 함께 이 그림을 굿즈로 만드는 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쿠지마 페트로프-보드킨의 <붉은 말의 목욕>(1912) 

 

 

물놀이와 몸의 관계는 정말 무언가 있긴 한가 봅니다. 얼마 전에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을 읽는데 <천사들>이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 내 몸을 누인다

개울물이 흘러 강물을 만나는 곳

잔물결 속에, 물이 온종일 데워져도

여전히 차가운 곳, 물살이 끌어당기고, 손가락뼈들이

떨려온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래

바위투성이 바닥에 달라붙고, 그러다 힘이 풀려

하류로 몸이 쓸려 들어간다

더 흔들림 없는 물속으로[각주:1]

 

<날개>의 물놀이 장면과 시 <물놀이>가 번뜩 떠올랐습니다. 클레어의 시와 다르게 시 <물놀이>는 사실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볕에 그을린 몸뚱이들은

장밋빛으로 둥글고

장미가 불을 지른 듯

근심 없이 붉다.[각주:2] 

 

한편, 바냐는 물놀이를 하면서 몸의 아름다움을 깨닫기도 하지만 물에 빠져 죽은 시골소년 바냐의 시체를 보면서 몸의 덧없음에 경악하기도 합니다. 클레어는 여기서 조금 방향을 틀어 몸의 소멸로 가지도 않고 몸의 예찬으로 가지도 않습니다. 그 중간의 상황을 견지합니다. 그러면서 물과 몸의 갈등(“여전히 차가운 곳, 물살이 끌어당기고, 손가락뼈들이 떨려온다.”)에 천착합니다. 이러한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바탕은 클레어가 집으로서의 몸을 파악하는 조건들에 있습니다. 몸은 몸 그자체로 집이 될 수 없고, 몸을 형성하는 외부 환경, 몸을 규정하는 낙인, 내 몸을 도둑질 당하는 경험, 그러나 그 몸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인식이 형성될 때 비로소 집이 됩니다.

 

그러나 바냐에게는 이런 경험이 부족합니다. 시트루프가 말하듯 몸은 몸 그 자체 원전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아름다움은 이때 발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몸이 아닌 것, 몸에 해를 끼치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몸을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고 나서야 아 이것이 내 몸이구나, 이것이 내가 되찾고 지켜야 할 몸이구나 깨닫는 것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29쪽에서 시트루프가 하는 말은 집과 몸에 대한 클레어의 이해와 정반대입니다. “당신의 환경은 좋지 않아요. 하지만 이 점이 오히려 전통적 삶의 모든 편견들을 없애주어서 당신을 더 훌륭하게 만들어줄 것이고, 원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정말로 현대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약간은 허무맹랑한 몸 그자체로서의 몸. 아마 그렇기에 역자후기에 옮겼듯 실업학교 학생이 막막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냐가 진정 집으로서의 몸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역사들, 억압들을 깨닫고, 구두장이 주제페가 말하듯 발가락 여섯 개 달린 발을 위한 구두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등장할 수 있는지 따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929년에 출간된 쿠즈민의 마지막 시집 <송어가 얼음을 깬다>의 표지

 

 

쿠즈민은 마지막 시집 <송어가 얼음을 깬다>에 실린 동명의 연작에서도 물놀이에 대한 시를 한 편 더 씁니다. 다음은 이 연작의 일곱 번째 일격을 보시기 바랍니다. <물놀이>장밋빛 천사들이 늙어서 다 죽고 마지막 남은 사람이 하는 물놀이일까요? 아무튼 두 가지 물놀이의 풍경이 사뭇 다릅니다.

 

일곱 번째 일격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멱을 감는다.

모욕 받은 눈길을

거리낌 없이 내던진다.

나체의 수치심을

괜스레 숨기는구나.

시골 마을 아무도

네게 관심이 없다.

그는 작게 성호를 긋고

절벽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좀 더 영특했더라면

나르시스가 되었을 텐데.

등에, 잠자리,

햇볕에 데워진 모래밭...

너는 하늘을 똑바로 바라본다

땅에서 이미 멀어져...

넌지시 알리는 것인가? 추억하는 것인가?

물 아래 잠긴 몸이

반짝인다, 녹색

운모처럼 빛난다.

어서 왼쪽으로 돌아

암초를 피해라!...

은빛 물고기가 두드린다

송어, 송어, 송어!...

 

3. 현대 러시아 퀴어 문화와 쿠즈민

 

연극 <송어가 얼음을 깬다>(2017)의 한 장면

 

 

<날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현대 러시아 퀴어 문화를 살펴보기 위해 2017년에 모스크바 고골 센터에서 초연한 <송어가 얼음을 깬다>의 한 장면을 보겠습니다. 이 연극은 쿠즈민의 마지막 시집의 시 열다섯 편을 낭송 또는 노래하고 중간 중간에 초기 시들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영상을 보기 전에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책에서 쿠즈민의 생애를 소개할 때 평생의 동반자였던 유리 유르쿤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유르쿤은 쿠즈민보다 스물세 살 정도 어립니다. 둘은 이십 년 정도 가까운 관계였지만 사실 말년에 가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보였다고 합니다. 쿠즈민은 유르쿤에게 아들래미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고요, ‘미스터 도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스파스카야 거리 17/19번지 9호 아파트에서 유르쿤, 유르쿤의 어머니와 함께 셋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르쿤은 사실 올가 길데브란트-아르베니나라는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 한때 레프 라코프라는 대학생과 연애를 하기도 했구요. 그러니까 쿠즈민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쿠즈민의 집에 살면서 쿠즈민의 연인 아닌 연인처럼 살았던 것이지요. 틈틈이 따로 연애를 하기도 하고요. 아무튼 복잡한 관계였던 모양입니다.

 

 유르쿤과 쿠즈민

 

 

연작 <송어가 얼음을 깬다>에는 말년의 쿠즈민과 미스터 도리안의 추억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전기적 사실을 모르고 읽더라도 훌륭한 시이고요. 고골 센터에서 올린 연극에서는 이 길데브란트-아르베니나를 등장시켜서 쿠즈민과 유르쿤의 슬픈 사랑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지만 아무튼 노래가 아름다워서 영상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다음은 연작의 <여섯 번째 일격/발라드>에 곡을 붙이고 쿠즈민, 유르쿤, 길데브란트-아르베니나의 이야기를 배우들의 연기로 풀어낸 장면입니다. (먼저 시를 읽으시고 영상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여섯 번째 일격 / 발라드

 

붉은 뺨에 아마 빛 머리칼의

선원, 먼 바다로 떠났네.

세월이 흘러 콧수염이 희끗,

가족도 기다리다 지쳤네.

할머니는 여러 해 동안

손자의 명복을 빌었고,

젊은 신부의 가슴에는

무거운 얼음덩어리.

밥상은 진즉에 치웠는데,

뼈다귀 핥던 강아지가

울부짖더니 주둥이를 드네...

문간에 불쑥 들어선 손님.

마흔 살쯤 먹은 낯선 선원.

여보쇼! 주인 계시오?

먼 곳에서 소식을 가져왔소,

안나 레이 부인 계시오?”

어떤 소식을 가져오셨나요?

우리 신랑은 세상 떠난 지 오래!”

소매를 걷자 드러나는

사랑스러운 그이의 점.

바로 나, 어윈 그린. 반갑게 맞으시오!”

신부는 넋이 나가 제자리에 털썩...

아버지 눈물 훔치고 어머니도 훌쩍,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네.

사방에 울리는 종소리,

들판을 채우는 -”,

안나 레이, 결혼식에 간다네,

그녀 옆에는 어윈 그린.

백파이프 소리 그들을 배웅하고

드디어 두 사람만의 시간.

그녀 하는 말, “묻고 싶었어요, 내 사랑,

정말이지 묻고 싶었어요.

나 홀로 지내던 그 세월,

그대는 온갖 나라 다니면서

고향 땅의 법도를

잊지 않았는지요?

성상에 인사 올리지도 않고

무릎을 구부리지도 않고,

합창대가 노래할 때

아멘답하지도 않고,

성수에 손을 담그지도 않고,

자리에 앉으면서 성호도 긋지 않더군요.

나의 친구여, 혹시 그대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를 져버렸는지요?”

나의 안나 레이, 맘 편히 잠들어요,

헛소리일랑 말아요!

그대는 북쪽 땅의

사람들을 본 적 없겠지요.

그곳에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초록빛으로 반짝인답니다,

줄기에 달린 심장 같은 꽃이

물 밖으로 자라 나오고,

꽁꽁 얼어붙은 별 하나

용감한 영혼을 위해 빛난답니다...

나는 당신의 신랑, 당신의 남편,

, 나를 똑똑히 봐요!”

여기저기 살펴보던 그녀

두려워 정신을 잃네...

함께 늙어갈 마흔 살의

그 선원, 어디로 사라졌나?

눈앞에는 고상한 차림새, 훤칠한 키,

주름살 없는 얼굴,

속눈썹이며 눈썹이며 관자놀이며,

눈을 뗄 수 없구나!

얼굴에는 부드러운 홍조가 놀고

뺨 한쪽이 유독 새빨가네.

어린 시절의 그 선원도

그토록 아름답지는 않았네.

아마 같이 가는 머리칼,

계속 뜨거워지는 입술,

기적의 힘을 지닌

두 눈의 초록빛 섬광...

오래 전 일이 떠올랐네...

이곳... 산 위에 솟은... ...

젊은 준남작이 죽었다네,

아침노을에 환히 빛나며.

한송이 꽃처럼 관에 누운 그,

괴로워 몸부림치는 그의 어머니.

어떤 목소리 안누시카에게 속삭였네,

저런 남자랑 자고 싶어!”

가벼운 것이 갈라지는 소리, 푸른 종소리,

사방을 둘러싼 불꽃,

초록빛 차가운 꿈이

잠자는 집을 감쌌네.

그녀 타오르며 눈물 흘리네,

기도할 힘도 더 이상 없네.

그는 우뚝 서서 대답을 기다리네...

밤이 가만히 쩔렁거리는 소리...

내 영혼이 파멸하고 있나 봐요,

당신은 아마 사탄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죽는 날까지 나는 당신의 아내.”

 

 

Один Байрон в спектакле Кузмин. Форель разбивает лёд. Гоголь центр 2 - YouTube

 

어떠신가요? 사실 저 배우는 미국 출신의 오딘 룬트 바이런입니다. 대학생 때 모스크바로 교환학생을 왔다가 연극을 배워 러시아 무대에서 계속 서고 있고요, 공개적으로 커밍아웃 했다고 합니다. 고골 센터가 러시아 시인의 대표 시집을 무대화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아흐마토바의 <주인공 없는 서사시>, 파스테르나크의 <삶은 나의 누이>를 연극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쿠즈민의 시집을 연극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러시아에서 일반인들은 쿠즈민을 잘 모릅니다. 20세기 초반 러시아시를 전공하는 사람 아니고서는 문학 전공자들도 잘 모릅니다. 그런 쿠즈민을 아흐마토바, 파스테르나크만큼 인지도 높은 시인들 옆에 올린다는 것이 이미 굉장히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동성애 주제가 농후한 시집을 선택했다는 것, 곳곳에서 유르쿤을 분한 배우와 젊은 쿠즈민을 분한 배우의 애정 장면이 드러난다는 것 등등. 동성애선전금지법이 맹위를 떨치던 2017년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뉴스에서는 공연을 소개하면서 제재 받은 연극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송어가 계속 두드리면 얼음이 깨지기는 깨지는 모양입니다. 오늘날 시작 활동을 활발히 하는 레즈비언 시인 두 사람과 트랜스젠더 시인의 시를 읽어보면 말입니다. 

 

---5편에서 계속

 

  1. 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 2021, 64 [본문으로]
  2.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사포 외 지음, 이성옥 외 옮김, 황인찬 엮음, 큐큐, 2017, 7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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