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송어가 계속 두드리면 얼음이 깨지기는 깨지는 모양입니다. 배부자료 4쪽과 5쪽에 현대 시인들의 시 세 편을 보면 말입니다. 마렌니코바와 스타로둡체바, 그리고 트랜스젠더인 체르니쇼프의 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크세니야 마렌니코바(1981-)
***
시디를 몇 장 들고 가는 길
어차피 넌 듣지 않을 테지만
나도 나대로 할 일이 있어:
received files 폴더에
내가 받아 둔 mp3랑 포르노사진이 있거든.
뭐가 들어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녀는 말라깽이, 키도 자그마하고
그녀 왈, 이 따위 가슴으로 뭘 하겠어
징글징글해
그녀는 갈비뼈를 쓰다듬다가
갈비뼈를 세다가 웃어
그 옆에 누워있는 나
(몸집이 큰 사람한테는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니란다).
하루는 둥그런 전등 아래 누워
일곱까지 세는데
눈이 감겼어
그리고 깨달았어, 그럴 수도 있겠다고
그냥 그렇게
너를 사랑할 수 있겠다고.
나탈리야 스타로둡체바(1979-)
젬피라를 위한 열 개의 노래 2
북새통 십이월 나는 쇼윈도에서 찾는다
너는 필름 조각에 지나지 않아 필요 없어
알아서 멈추겠지 너는 피곤해 질 테고 나는 슬퍼하며
필체를 골라내고 근데 됐어
또 시작이네 귤 파이 금색 크리스마스 반짝이
네 말이 두렵지 않아 나는 그런 말은 할 줄 몰라
파벨레츠키 역에서 슈라를 좇아내네
근데 있잖아 더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싶었어
내가 특히나 필요 없는 곳
아프리카 멕시코에서 제니퍼 로페즈가 팔딱팔딱
두 잇 투게더 대추야자 무화과 수사자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겠어 바보 마초 지지배
프리드리흐 체르니쇼프(1989-)
***
건너편에 앉은 사내
짧은 가죽잠바 바지에 늘어뜨린 사슬 두 개
산타클로스 모자
바지의 사슬 때문에 생각났다
사슬 사이로 주머니가 엿보인다
엔지니어드 진, 스키니, 통바지가 있다지만
이건 멘스 팬츠
m.p. - 특수 청바지의 한 종류
양쪽 무릎 옆에 주머니가 달려 있는데
그 용도는 하나
신발 가게에 일하러
갈 때
한동안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지
않을 때
m.p.의 오른쪽 주머니에는
탐폰
왼쪽 주머니에는 사용한 것들을 담는
비닐봉지
위생도구는 열을 지어 이주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렇게 쓰레기 주머니에서 거주한다
2호선 오볼론 역까지
모든 것을 무릎 위에 지고
m.p. 특수 위장복의 한 종류
남자화장실 청소부 아무도
너의 비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이 시들을 읽다보면 2000년대 초반을 강타했던 여성 듀오 <타투>도 생각나고 그렇습니다. 여담으로 <타투>의 멤버 중 한 명은 율리야 볼코바는 올해 4월 러시아 총선에 입후보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보수여당인 <통합러시아>당 후보로 말이죠. 아무튼 2000년대 이후에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현대 러시아 퀴어 작가들의 글을 더 많이 옮겨드리고 싶었지만 미처 그러지 못했습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카렌 샤이냔(1981-)
대신 영상 하나를 간단히 보겠습니다. 바로 얼마 전 퀴어 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카렌 샤이냔이 <크비로그라피야>라는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첫 세 편을 유튜브에 공개했습니다. 원래는 러시아 LGBT 네트워크의 창립자인 이고르 코체트코프의 인터뷰를 번역해 드리려고 했는데 그보다 더 따끈따끈한 소식이라 이 영상을 보여드립니다. ‘크비로그라피야’라는 제목은 퀴어를 뜻하는 러시아어 ‘크비르’와 지도제작을 뜻하는 ‘카르토그라피야’를 합친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의 지방 대도시들에서 퀴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찍은 다큐멘터리입니다. 2주 전에 우랄지역의 대표적 공업도시 예카테린부르크 편을, 이어서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 편을, 바로 사흘 전에는 시베리아의 과학 도시 노보시비르스크 편을 찍었습니다. 예카테리나편의 첫 장면을 3분 정도 보겠습니다.
여력이 된다면 샤이냔에게 연락해서 이 영상들의 한국어 자막을 달아보겠습니다. 어젯밤에 우연히 이 영상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서울 오는 버스에서 예카테리나편을 보았습니다. 한국의 <크비로그라피야>를 찍는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4. 마무리
지금까지 첼랴빈스크에서 자드니 노브고로드로 떠나는 이반 둘린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벨리키 노브고로드의 온핌을 들렀다가 모스크바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이젭스크의 하리토노프, 니즈니 노브고로드를 들르지 않고 이탈리아로 떠나는 바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곳곳의 퀴어의 삶을 기록하러 다니는 샤이냔까지 만났습니다.
오늘 북토크의 제목은 제가 아니라 최성경 대표님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저는 그냥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가칭으로 ‘러시아 퀴어 문학과 쿠즈민의 <날개>’라고 보냈더니 ‘시작’의 의미를 넣어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쿠즈민의 <날개>를 통해서 러시아 퀴어 문학이 시작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작나무 껍질에 편지를 썼던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퀴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고 스코틀랜드 혈통 출신인 레르몬토프도 ‘퀴어’라는 단어를 몰랐을 것입니다. 물론 오스카 와일드를 러시아어로 옮길 정도로 영어를 잘 알았던 쿠즈민도 ‘퀴어’라는 단어를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접하고 사후적으로 돌아보니 규범적 이성애주의에 맞지 않는 삶의 모습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는 더욱 다양하고 새로운 삶의 모습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퀴어’라는 이름 아래 모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 년 전에 나온 쿠즈민의 소설을 가리켜 러시아 퀴어 문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서로 아무런 연관 없이 내버려져 있었을, 쿠즈민 이전의 다채로운 삶들과 쿠즈민 이후의 역동적인 삶들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12월이기도 하고 엄동설한 물놀이를 즐기는 우리의 송어가 마지막 얼음을 깨길 바라면서 6쪽에 우리말로 옮긴 <송어가 얼음을 깬다>의 <열두 번째 일격>을 러시아어로 읽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