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문화과학》 113호(2023.봄)에 실린 글입니다. 인용시 《문화과학》 출판본으로 사용 바랍니다.
1. 재난은 서사를 통해 재난이 된다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국가가 행위자(agent)가 되어 국민을 대상으로 집행하는 국가폭력[각주:1]의 희생자들이 내걸었던 요구는 90년대 이후 발생한 재난·참사 희생자들의 요구로 반복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적 재난에 대한 국가 책임과 구조와 수습과정에서 문제로 재난에 대한 ‘국가 부재’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되면서 세월호 참사 이전의 참사를 포함해 사회적 참사들에 대한 진상규명의 부재와 ‘꼬리 자르기’ 식으로 이뤄진 책임자 처벌의 문제 등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전국의 재난 참사 피해가족들은 202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참사 2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대구에 모여, 재난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연대와 권리보장을 위한 ‘(가칭)재난피해자권리옹호센터’ 설립을 준비하며 한국사회 최초로 재난 참사 피해자들의 전국 모임[각주:2]을 가졌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30여년 간 발생한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우리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우리는 각자 뜻하지 않은 참사로 가족을 잃었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삶을 잃었으며,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아이들, 부모, 형제들의 때 이른 죽음을 마주하며, 어떤 이유로 우리가 겪어야만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진실을 밝혀, 그 책임을 지라고 외쳐왔습니다…. 재난 참사의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책임자 처벌이 요원해지는 세월이 더해져 전국의 재난참사피해가족들이 2023년 이곳에 모일 만큼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피해 가족들’이 생겨났습니다.[각주:3]
재난 참사 피해자들이 내건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의 문제는 사고의 구조적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사고조사보고서가 공식적으로 작성된 사례가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제외하고는 전무하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참사는 구조적인 원인보다는 기술적이고 표면적인 원인으로 참사를 둘러싼 원인의 가장 말단에 위치한 자들만이 처벌되거나, 정권이 ‘조기 수습’을 목표로 한 고위 공무원들의 ‘경질’과 ‘사퇴’로 일단락하는 방식이 반복되었다. 그 결과 참사가 야기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은 채 참사가 반복되어왔다.
1993년 10월 10일,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참사 발생 8일째에 교통부장관과 해운 항만청장을 경질했다. 다음 해인 1994년 10월 성수대교가 붕괴해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서울시장은 사고 당일 바로 경질됐다. 같은 날 이영석 국무총리가 사고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지만 반려됐다. 다음 해인 1995년 6월 29일 또다시 참사가 발생했다. 사망자만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으로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사상자가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가 발생하자 당시 조순 서울시장은 부시장을 경질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박근혜 대통령은 남재준 국가정보원장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경질했다.[각주:4]
그러나 이러한 문책성 경질을 한 것을 두고 역대 정권이 책임자들에게 제대로 된 책임을 물어왔다고 볼 수는 없다. 1999년 6월 30일 유치원생과 교사 23명이 사망한 씨랜드 화재 참사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진상을 규명해 책임자를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이 사고의 책임을 김종필 총리를 비롯한 내각에게 묻지 않았고,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참사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참사 현장을 훼손하고 시신이 채 수습되기 전에 청소를 감행한 조해녕 대구시장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 없는 책임자 처벌은 참사의 조기 수습을 목적으로 한 ‘꼬리 자르기’ 식 경질이라는 점에서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비판을 받아왔다.
10.29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00일이 넘도록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책임지고 사퇴하거나 윤석열 대통령의 문책성 경질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당이 주도한 국회가 역사상 처음으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각주:5]
윤석열 정부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책임자 처벌 요구에 대해 “책임에 대해서는 진상 확인 결과가 나올 테고 거기에 따라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사고 원인을 규명한 다음”[각주:6]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의미하는 ‘진상규명’은 재난의 구조적 원인 규명을 위한 재난조사가 아니라, 수사에 따른 법적 책임 여부에 한정되어 있다.
재난은 직접적인 국가폭력과 달리 직접적인 폭력을 지시한 명령권자를 지목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부작위’에 따른 법적 책임을 묻기 힘들다. 따라서 재난을 둘러싼 책임의 문제는 법적 처벌로 국한되지 않은 정치적 사회적 책임의 차원에서 제기된다. 재난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원인들의 결과로 발생하기 때문에, 부작위에 의한 책임을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재난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사고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조사는 책임자 처벌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재난의 구조적이고 기술적인 원인을 밝히고 재발방지대책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재난 피해자들이 이야기하는 ‘진상규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상규명’은 재난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사고조사를 넘어 재난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재난 이후 ‘안전사회’라는 소망을 포함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이야기하는 ‘안전사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안전공학자들이 말하는 ‘안전’에 대한 제도적, 기술적 안전과는 무관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범주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전쟁 피해자들이 말하는 ‘평화’, 반독재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국가폭력’이자 ‘사회적 타살’로 규정된 죽음이 갖는 ‘민주주의’ ‘자주통일’과 같은 이념의 수준에서 상상된다. 그래서 재난 피해자들의 ‘안전’에 대한 소망은 기술적이거나 개인적 차원에 속하는 소망이 아니라 재난이 발생한 사회적 구조적 조건에 대한 비판적 관계를 유지하는 소망이다.
이는 재난 피해자들에 대한 공적 애도의 열망이기도 하다. 국가가 전쟁의 피해자를 인정하거나 독재에 항거한 이념의 당위성으로 희생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에 비해 재난은 ‘불운’이거나 ‘재발방지 대책의 수립’ 혹은 ‘피해보상’ 차원에서 피해가 과소규정되며, 재난 피해자들에게는 종종 ‘나라를 구하다 죽었냐’는 식의 비난이 뒤따른다. 따라서 희생자에 대한 불인정이 곧 진상규명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국가폭력’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재난은 사회적으로 재난을 어떻게 서사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보다 중요해진다. 물론 국가의 사과와 책임, 그리고 구조적인 원인 규명은 매우 중요한 서사 구성의 요소들이고,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과 책임 그리고 원인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과제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재난을 둘러싼 서사는 국가의 인정을 넘어 사회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을 구성하는 서사는 확장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진상규명’은 진실의 왜곡, 은폐, 축소, 책임회피의 반대항에 자리 잡으며, 은폐 이데올로기를 ‘허구적 이야기’로, 그 반대항에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 원인을 진실의 자리에 놓는다. 그 결과 재난의 진실에 도달할수록 즉 ‘최종적으로’ 작성된 진상조사보고서는 재난과 연루되어 있는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감정, 진상규명을 위한 과정에서 일어난 각종 부조리한 억압과 폭력, 참사와 관련된 각종 이미지뿐만 아니라 말해지지 않았거나 말해질 수 없는 것, 원인 규명의 범주에서 배제된 의혹이나 ‘부수적’ 이야기들이 탈락된 채 구성된다.[각주:7]
그것은 사법적 결과는 아니지만, 사법적 표현형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서술된다. ‘안전’에 대한 기술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담론은 매우 한정적인 수준에서 재난사고조사를 수행하는 반면, 재난서사는 오히려 참사 직후 피해자와 정부, 그리고 언론, 시민들의 행위를 통해 구성되며 재난의 인식을 둘러싸고 지배적인 “서사적 권력의 체제들”이 작동하는 국가주의적 재난서사와 이에 대항하는 재난서사가 갈등적으로 구성된다. 더불어 대항적 재난서사는 재난의 ‘구조적 원인’을 넘어 참사 이전 안전하다고 믿은 사회에 대한 재해석과 더불어, 구조와 수습을 포함한 사후적인 대응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구조적 폭력’의 문제로 해석하는 서사화를 통해 재난을 보다 정치화시키고 사회적 애도를 급진화하려는 실천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금, 대항적인 재난서사는 어떤 조건 위에서 구성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또 이를 위해 재난서사는 어떤 지배적 규범 위에서 작동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월호 참사 이후 참사인 이태원 참사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세월호 참사 보다 퇴행적인 재난대응을 일관하는 반면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포함한 재난참사 유가족과 사회운동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참사, ‘두 번째’ 참사를 정치화시키기 위한 과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다음 원고 2. 실패의 봉합과 국가주의 재난서사의 반복으로 내용이 이어집니다.
진태원, 「국가폭력이란 무엇인가」, 『국가폭력, 재난, 전쟁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2022년 1차 학술대회 자료집』, 141쪽. [본문으로]
재난참사 피해가족 연대에는 ▲대구지하철참사유가족협의회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인현동화재참사유가족협의회 ▲한국가습기살균제참사범단체victims ▲태안해병대사설캠프참사유가족협의회 ▲스텔라데이지호대책위원회 ▲삼풍백화점참사피해가족협의회 ▲씨랜드참사가족협의회 등 8개 단체가 참했다. 현재는 초동 모임으로 각 지역에서 발생한 재난과 참사 유족 단체들의 참여를 확대할 계획이다. [본문으로]
국가정보원장의 경우 ‘초동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아 청와대와 정부의 미숙한 대응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국가안보실장은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는 말로 여론을 악화시킨 책임을 물었다. [본문으로]
탄핵소추안에 담긴 이상민 장관의 탄핵 사유는 첫째 이 장관이 재난 및 안전관리 사무를 총괄·조정하여야 할 책임이 있고, 다중밀집사고가 충분히 예견됨에도 사전 관리감독 의무를 소홀히 하는 등 사전 재난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아 헌법 34조 6항, 재난안전법 제4조, 제22조, 제23조 등 위반했다는 점. 둘째 △참사 발생사실을 인지하였음에도 대통령 지시조차 제때 이행하지 않은 채 재난대책본부를 적시에 가동하지 않고 수습본부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참사를 보고받고도 자택에서 관용차를 기다리다 뒤늦게 참사현장에 도착한 뒤 구체적 지시나 조치없이 현장을 떠나 사후 재난대응조치 의무위반으로 재난안전법 14조, 15조, 15조의2, 18조 등의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본문으로]
시사위크, “윤석열 대통령 사과 여부 ‘선 진상규명 후 사과’”, 2022.11.1. [본문으로]
2022년 9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3년 6개월간의 활동을 종료하며,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 종합보고서를 발간했다. 『4·16 세월호 참사 종합보고서』는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8년간의 진상규명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최초의 재난 참사 종합보고서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