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실천(감각)과 사물화
일상, 현실, 사회적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모든 시선과 표상은 문화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문화를 통해, 문화와 함께 행동하며, 사회는 문화적 퍼포먼스로서 재현된다. 이 연재 글에서는 문화주의, (포스트)구조주의, 구성주의, 실재론 등 사회과학 및 문화연구방법론을 통해 재현과정, 즉 문화-사회적 텍스트를 응시하고 해석/해체하는 기초적인 관점을 다룬다. 이 연재는 2016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진행한 문화연구방법론 "응시와 재현의 문화사회학" 강의원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학술논문이 아니므로 인용은 삼가해 주세요. 문의는 이메일(hyunjun79@daum.net)로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구조)란 무엇이며,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이 글에서는 사회세계가 일상의 상호작용 및 실천, 집합적 표상 및 비합리적 요소(도덕감정)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이 마치 사물처럼 우리에게 현현한다는 사회적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아울러 해석학적이고 현상학적이며 미시사회학적인 접근을 통해 행위자의 의미세계와 성찰성, 그리고 그 안에서 객관적으로 물화된 구조를 포착하는 방식(방법론)을 이해하고자 한다.
1.
어떤 대화 상황을 가정해 보자.
A: 안녕, 오랜만이네. 언제 밥이나 함 먹자.
B: 정말 오랜만이네. 근데 언제?
A: 음... 조만간?
B: 조만간 언제?
A: 음;;; 한 두 달 내에?
B: 구체적으로 언제? 꼭 밥을 먹어야 해?
A: 아니... 뭐... 꼭 밥을 먹자는 게 아니라...
B: 밥 먹을 게 아니면, 왜 밥을 먹자고 해?
A: 아니, 난 그냥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 좀 하자고...
B: 무슨 이야기?
A: 그냥 사는 얘기...
B: "사는 얘기"가 뭔데? 왜?
A: 아 몰랑 됐어. 그만 하자! 잘 가라!
여기서 A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A는 그저 인사나 안부를 전하고자 한 것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B는 A의 의도를 집요하게 묻고, 말꼬리를 잡듯이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질문을 던지면 던질수록, 의문을 제기하면 제기할 수록 대화는 산으로 가고,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정상적인” 대화가 진행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화를 내거나 안절부절해 하거나 대화를 아예 거부해 버린다(Garfinkel 1967: 44, 221-226). 대화의 분열적 상황에 직면해서 피실험자는 불안과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알렉산더 1993: 278). 그리고 일상의 인지적 관습을 위한하는 자를 향해 분노가 폭발한다(콜린스 2009: 156). 이 대화의 결과는 되풀이되는 일상의 붕괴, 대화의 규칙, 전제, 신뢰, “사회 질서의 붕괴”(알렉산더 1993: 278)였다. 이 대화에서 B는 일상의 "정상적인" 대화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일상의 규칙들을 위반하고 저항할 때, 사회질서나 구조적 실재가 그 모습을 드러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때,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대화의 "정상성"이나 어떤 "암묵적" "규칙"에 대해 성찰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암묵적인 사회적 규칙의 힘이 어떻게 사람들의 상황의존적인 일상적 실천을 통해서 구성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가핑클(Harold Garfinfel)이 고안한 이런 식의 사회적 실험을 '위반실험(breaching experiment)' 또는 '신뢰실험'이라고 한다.
이 실험은 일상적 사회질서가 너무나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어서 그것이 우리들이 함께 만든 자의적 형성물이라는 의심을 우리들이 일상 속에서 회피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사회적 일상은 의심을 회피는 관행(콜린스 2009: 155)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일상의 실재는 우리 인간들이 함께 만든 것(자의성)이지만, 주어진 세계에 대한 의심을 유보(‘판단중지’)하고, 마치 필연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생각된다(‘자연적 태도’). “행위자는 세계에 깊이 함몰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 가는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다”(알렉산더 1993: 256).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단순히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암암리에 자의적이고 통상적인 방식으로 사회 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강렬한 부정적 감정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콜린스 2009: 154-155).
일상은 어떤 “자명성” 속에 놓여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상적 실재란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어떤 당연시되고(taken-for-granted) 암묵적(implicit)인 상황적 맥락(indexicality)과 관습적인 관행들 속에 배태되어 있다. 후썰에 따르면, “매일 매일의 실제적 삶은 순진하다. 왜냐하면 이미 주어진 세계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 대한 나의 지식의 타당성은 이후에 주목을 받게 될 때까지, 곧 그 지식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떠오르기 전까지 나 자신과 타인들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나의 지식이 만족스럽게 작동하는 한, 나는 대개 그 지식에 대한 의심을 중지하게 된다. 극장이나 교회에서 농담을 하거나 철학적 추론에 몰두하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의 실재로부터 분리된 특정 태도에서는 아마도 그 요소들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때조차] 이 의심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버거, 루크만 2014: 74).
의심하지 않는 태도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대화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대화의 전제, 게임의 규칙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는 비합리적 기반 위에 인간사회가 서 있다.
2.
우리는 세상을 믿는다기보다는 의심하지 않는다. 삶의 대부분은 믿음의 적극적 실천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의심을 배제하는 관행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믿음(의 담론적 표명)이란 의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합리적 변명이나 알리바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는 태도는 단지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부단한 무의식적이고 비인지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비록 그것은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은 아닐지라도 인간관계의 상호작용과 집단적 공모 속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을 망각하는 부단한 무의식적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평상심을 가지려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또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사실도 느낄 수 없어야 한다. 일상적 실재는 사람들이 공들여 이루어낸 성취물이다”(콜린스 2009: 158).
(자연주의적 오류를 감수하고 비유하자면)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물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없을 것이다. 물고기에게 물은 의심조차 할 수 없이 당연시된 세계이며 존재의 조건이다. 사회적 질서나 구조란 기압이나 중력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은 기압에 적응해 왔기에 기압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나의 신체는 외부의 기압에 끊임없이 적응/저항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화할 때, 명확하게 말로 규정할 수는 없어도 실천할 수 있는 어떤 배경 지식(또는 상식, ‘저장된 지식’)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과 기대(신뢰와 도덕감정, 의무 등) 위에서 행동한다. 인간의 사회적 삶에는 반복되는 어떤 패턴이 있고, 규칙이 있다. 하지만 사회적 삶에서 보여지는 어떤 패턴이나 규칙은 주어진 추상적 규칙(규범)을 “꼭두각시(cultural dope)”처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따라가면서 만들어 지는 행위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이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적(ad-hocing)으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감(sense; feel for the game)”을 체화하는 것이다. 슈츠는 이러한 체화된 지식을 ‘요리[책] 지식’ 또는 ‘처방전 지식’이라고 했다. 예컨대 이는 “네트를 향해 뛰어가는 테니스 선수의 순간적인 결정”(Bourdieu 1990: 11)과도 같고, 오케스트라의 협주와 같이 합리적인 성찰 이전에 몸에 새겨진 감각으로서,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문제없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아비튀스)에 배태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패턴은 내 맘대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상호작용 맥락 속에서 만들어지고 정당화된다. 즉 그러한 규칙들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상호주관적인 것이다. 위반실험에서 보듯이, 개인은 그 규칙이나 상식을 얼마든지 (일부러든 아니든) “위반”하거나 “실수”하며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개개인이 위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집단적인 지식이나 규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위반을 위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상”(nomal)적인 실천(규칙 따르기)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위반이나 실수(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공동체에 기반한 집단적 규칙을 상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의 암묵적 규칙이자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하던 관습대로 하는 것이 “정상”이다. “심지어 내가 이 규칙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위반했을 때에도 나는 항상 그것들과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극복했을 경우에도 그것들은 저항을 통해 자신의 구속력이 충분히 감지되게 만는다”(뒤르켐 RSM; 기든스 2010: 189에서 재인용). 공교롭게도 우리는 어떠한 사회적 규칙을 위반하거나 저항할 때에만 사회적 현실의 현실성(또는 실재성, 강제성)을 확인할 수 있다.
3.
이러한 사회적 규칙이 우리의 생활세계를 이루고 있다. 명시화하기 어려운 대화의 규칙과 같은 상호작용의 전제들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객관적으로 관찰가능한 것처럼 보고(reportable)하고 해명할(accountable)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세계의 질서가 자기 스스로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나름의 의견들을 갖고 있다. 이것을 남들에게 설명할 때, (본질에 천착하지 않고도) 자신들이 처한 지엽적 상황과 맥락에 맞게 자신들의 행위의 의미(실천적 지식)를 조정하고 말이 되게(make sense)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회적 실재(현실)를 창조하는 방법이다(ethnomethodology).
아울러 개인의 위반에는 반드시 어떤 댓가가 따른다. 위반한 당사자는 주변인으로부터 유무형의 어떤 압력을 받게 된다. 비난을 받거나 심지어 처벌을 받기도 한다. 또 이러한 압력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도 하다. 그 시선은 내면화되며, 우리는 내면화된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평가하게 된다. 이렇게 집단적 규칙은 강제 아닌 강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제로 느낄 수조차 없을 만큼, 마음에 자발적으로 품은 의미처럼 수용되기도 하고,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객관적 강제력이기도 하다. 즉 집단의 규칙이나 지식은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믿고 따르는 만큼(대개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만큼) 강제력을 가진다. 대개 도덕적 권위나 의무의 형태가 그러하다.
다시 말해 집합적 실재는 개개인의 의도나 행위와는 독립적으로 기능한다. 개인적 표현과는 독립된 고유의 존재성을 가진다. 가령 언어, 상징체계, 집합표상, 제도, 인구분포, 자살률, 출산률, 패션유행, 화폐체계, 시장경제, 자본주의 등은 내가 그것들의 사용을 거부하는지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사회적 실재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실재는 사람들의 일상적 실천의 반복을 통해서 구조화되고 의미부여되며 해석된다는 점에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되는 실재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social reality)을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social fact)"라고 표현했다.
위반실험 사례는 사회적 현실이 관습적일 뿐만 아니라, 강렬한 도덕감정과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우리가 강렬한 부정적 감정(혐오, 불안 등)을 경험할 때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어떤 대상이나 영역이 훼손되거나 침해되었을 때이다. 그러한 감정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 감정과 현실을 봉합하려고 하기도 하고,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어떤 가치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위반실험은 성스러운 대상을 훼손하는 행위로, 금기 의례의 위반이 원시 부족민에서, 성경 모독이 기독교인에게, 국기 훼손이 애국자에게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콜린스 2009: 156).
뒤르켐은 이러한 세계의 실상을 ‘성스러움(the sacred)’이라고 말한다. 즉 사회적 현실(reality)은 성스러운 것이고, 인간은 그러한 성스러움에 둘러싸여 의심없이 살아가지만 그것이 침해될 때에는 격렬하게 반응한다. 뒤르켐은 “성스러운 대상에 도덕적 감정이 실린다고 말한다. 성스러운 대상에 불경이 행해지면, 도덕적 유대의 긍정적 감정은 부정적 감정으로 바뀌어 불경을 저지른 바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로 표출된다”(콜린스 2009: 156).
사람들은 성스러운 대상에 의미, 존경, 헌신을 바치고 또 그러한 의미의 의례를 행함으로써 성스러운 대상은 사물화(reification)된다. 사물화된다는 것은 곧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실천으로 의미부여된 대상(집합표상)을 인간사회의 의미부여와 상관없이 외부에서 주어진(이미 해석되어진) 성스러운 존재로 신비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뒤르켐에 따르면 그 무엇보다 신성한 것으로 신비화된 것이 바로 “사회”(라고 쓰고 “신”이라 읽는다)이다. 사물이 신이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숭배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물신, 화폐물신(숭배)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토지는 소위 원시 사회에서 나무나 직물 숭배와 비슷한 마술적 능력을 획득한다. 우리는 사물을 인격화하는 주술적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하인리히 2016: 268). 가장 대표적인 신비화의 사례가 임금형태인데, 이것은 노동의 가치 자체가 전도된 이데올로기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임금을 받기 위해 수행해야할 것은 하루 여덟 시간 동안의 노동이다. 여기서 임금은 이 노동의 대가인 것처럼 보이게 되며 (…...) 시간급이나 성과급은 이런 가상을 더욱 강화한다”(하인리히 2016: 140). 노동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본가들 또한 전도된 가상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물신주의는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화폐, 자본)의 성스러움에 대한 낭만적 헌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자연적 사물과 다른, 사회세계의 '독자적인(sui generis)' 특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