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 등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젠더 억압, 생태 파괴 사이의 체계적 연결을 빚어냄으로써, 자본주의적 수탈의 규모에 관해 강력한 설명을 제공한다. 이러한 설명은 마녀 사냥, 식민주의, 노천광, 성 관광을 동일한 체계적 논리 아래로 끌어모으는 것을 가능하게 하나, 결국 우리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극심히 넓고 이질적인 현상들에 관해 상당히 추상적인 이론화를 하게 된다는 결점을 지닌다. 따라서 나는 이 틀을 더욱 정교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정과 갱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여태까지 논했듯 수탈하고, 값을 깎고, “무임승차”하려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포착하고 분석하는 것에 더해, 오늘날 자본주의가 자연과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자신의 가치 순환 속으로 흡수하는 방식을 특징짓는 최소한 두 가지의 내재적 경향, 즉, 자연의 자연으로서의 상품화와 자연의 실질적 포섭을 포착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이 기제들은 서로를 강화하고 보강하기도하나, 서로 대립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추가적인 기제들을 포착하는 것은 근 수십 년간 자본주의에서 일어난 전환들에 대한 대응으로 여겨져야 한다. 많은 이론가들이 논하듯, 오늘날 자본주의는 18, 19세기 식민주의로 이어진 유럽 중심주의적인 자본주의보다 유동적이고 유연하다(Nanda 1997, 366). 나는 특히 두 가지 발전, 지배적 경제 패러다임으로의 신자유주의 발전과 생명공학의 극적인 발전 및 그 광범위한 상업화를 강조하고 싶다.
자연의 자연으로서의 상품화
미즈 등의 생태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포함하는) 자연 수탈의 주된 문제는 무임승차, 즉 값을 치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은 무한하고 따라서 배상 없이 수탈될 수 있는 것으로 은연중에 가정되는 무료 자원으로서 외부로 축출된다. 그러나 제이슨 무어가 적듯, 자연의 “공짜 선물”은 그저 따기만 하면 되는 “손쉬운 과실”이 아니다. 본원적 축적이라는 발상은 “값싼 자연”이 실제로 생산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값싼 자연”은 노예제나 노천광 같은 잔혹하고 파괴적인 과정을 통해 수탈되는 것이다(Moore 2015, 64).
그러나 현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특히나 의미심장한 흐름은 정반대의 조류, 즉 더 많은 활동과 자산을 자본주의적 시장 내부로 포함하려는 시도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에 따르면, GDP가 시장 거래로 측정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시장화는 경제 성장을 가속하는 매우 효율적인 수단이다. 따라서, 예컨대 과도한 온실가스로 인한 대기 오염 등 오늘날에도 외부로의 축출이라는 중요한 과정이 작동함을 확실하게 포착할 수 있더라도, 우리는 자연을 더욱 완전히 자본주의적 시장 내부로 포함하려 하는 기제들 역시 포착해야 한다.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는 모험적 자본주의(venture capitalism)가 발견하고 수탈할 “처녀지”가 계속 존재하였지만, 오늘날 그러한 외부를 찾는 것은 어렵다. 모험적 자본주의가 새롭고 창의적인 형태를 취할 것이 강요되었다.
닐 스미스는 우리가 자연과 우리 사이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극적으로 변화한 시기에 살고 있다는 강력한 주장을 내놓았다. 자연은 전례 없이 자본화되었다. 자본주의적 자연은 자연적으로 제공된 사용가치들이 생산적 소비를 위해 약탈되었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상품화되어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완전히 새로운 범위의 “생태적 상품들”이 생산되고 있다. 스미스는 “자연의 전통적 상품화가 탁상을 위해 나무를, 에너지를 위해 기름을, 강철을 위해 철광석을, 빵을 위해 다양한 곡식들을 취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해 사용가치를 원료로 수확하는 것에 일반적으로 관련되었다면, 상품의 이러한 새 세대는 다르다”고 적고 있다(스미스 2007, 17). 탄소 배출권이나 공해 배출권 같은 새로운 생태 상품들은 역설적으로 자연을 자연으로서, 자본주의적 수탈 밖에서 생산되지만 교환가치가 부여됨으로서 자본주의 경제 내부로 포함되는 것으로서 상품화한다. 예컨대 항공 여행으로 생산되는 특정량의 탄소를 상쇄하는 우림 지역과 같은 생산된 상품의 가치는 그것이 생산적으로 소비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정확히 기초한다. “(대개 비교적 빈곤한 열대 국가에서) 우림 지역에 땅을 가진 지주들은 자기 삼림을 벌채하지 말라고 돈을 받으며, 그동안 세계의 더욱 산업적인 지역의 주요 공해 유발자들은 오염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 배출권을 구입할 수 있다.”(19)
즉, 우리는 한 쌍의 운동을 포착할 수 있다. 자본은 예컨대 공해를 배출함으로써 가격을 외부로 축출하고, 이는 예컨대 공해 거래의 형태로 내부로 포함하는 기제들을 통해 다른 기업들이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같은 기업들이) 자본 축적을 할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자본의 환경 전유는 내부로의 포함과 외부로의 축출이라는 기제 모두를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사용하며, 이윤을 극대화하고 경제 성장을 추동하기 위해 사회 · 정치적 맥락에 따라 사용한다. 생태적 관점에서는 이 가운데 어떤 기제도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자연에 대한 자본주의의 무임승차는 명백히 문제적이나, 자본주의적 시장 안의 일부로 삼아 환경을 보호하려는 시도 역시 중대한 문제들을 지닌다.
먼저, 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율적인 시장 체제 내에서 환경에 의해 생산되는 외부성들을 완전히 내부로 포함하는 것은 어렵다. 환경은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생산되지 않는다. 환경은 복합적이고, 통합적 전체이며, 궁극적으로는 전체 생물권을 포함한다. 존 벨라미 포스터가 설명하듯, 시장 체제 내에서 환경을 내면화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생태계들이 먼저 별개의 재화와 서비스들로, 예컨대 대기질, 특수한 동식물종, 세계 기온의 유지 등으로 분해되어야 한다. 그 뒤 이 특수한 부분들은 수요공급 곡선의 형성을 통해 값이 매겨진다. 그러나 가격 책정 과정도 난관이 가득하다. 헤도닉 가격기법에서는 주어진 환경 생산물과 긴밀하게 관련된 재화 및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통해 소비자의 선호가 확립된다. 조건부 가치측정법에서는 가상의 시장이 구성되고 소비자들은 설문 조사를 통해 자신의 선호를 표현한다. 이 설문 응답들을 이용하여, 경제학자들은 인구 전체에 분포된 결과들을 집계하여 가상의 환경 상품을 위한 수요 곡선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기성 시장에서 가격을 변경할지 아니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낼지 결정하기 위해 시장의 기제들과 정책적 수단들이 만들어진다. 이 모든 단계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환경 보호 시장은 시장으로서,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조차 잘 기능하지 못했다(Foster 2002, 27-28/포스터 2007, 49-51).[각주:1]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내부로 포함하는 기제들과 관련된 문제들은 더욱 심각할 수도 있다. 예컨대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논하듯, 시장은 재화와 서비스를 할당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교환이 이루어지는 재화 및 서비스에 대한 의미, 가치, 태도를 중요하게 표현하고 촉진하기도 한다. 내부로 포함하는 기제들을 통해, 환경은 서로 다르며 시장에 기초한 효용의 집합이 되며, 그 가치는 개별 인간의 자기본위적 소비자 선호에 따라 결정된다. 이로써 철학적 문제는 예컨대 설문 방법을 통해 올바른 가격을 확립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경제적 가치가 아직 부여되지 않은 환경의 여러 측면을 보호하는 기술적 어려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방법들이 고유의 가치를 계산할 수 없다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Sandel 2012).
내 모국인 핀란드의 예를 들어보겠다. 핀란드의 현 정부는 바이오 에너지에 상당한 투자를 하여, EU의 에너지 및 기후 목표치를 충족시키려 한다. 비판자들은 이 전략이 극도의 벌채에 의존하기에 기존의 삼림이 탄소 흡수대로 기능할 능력을 저해하여 기후 변화를 사실상 악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뒤이은 토론에서 정부의 전략을 옹호하며 반복되는 주장은, 오래된 삼림을 베고 이를 더 젊고 빨리 자라는 삼림으로 대체한다면 탄소 흡수대를 약화시키지 않고 벌채를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삼림의 이러한 대체는 집약 재배 체계로 가능할 것이며, 탄소 흡수대로 더욱 효율적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한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와 무관히, 이 사례가 분명히 하는 것은 이 틀 안에서 삼림이 오래되었고 생태적으로 다양하다는 사실이 아무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된 삼림의 파괴는 환경을 보호하고자 의도된 시장 기제들로부터의 배제가 아니라, 시장 기제들로 포함됨으로써 유발된다.[각주:2]
환경과 여성 재생산 노동이 자본주의적 축적 논리 속에서 유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여성 재생산 노동과 맺는 관계에서 상응하는 전환을 포착할 수 있다. 이는 사적 영역을 상품화하고 여성을 임금 노동자로 전환하려는 근래의 시도들과 상응한다. 근 수십 년 우리의 경제에서 이루어진 급속한 신자유주의화는 가정의 돌봄 제공자라는 여성의 전통적 역할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우리는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하곤 했던 정서적 활동과 돌봄 활동이 육아든 가사 도우미든 의료 서비스든 점차 유료 서비스로 변화하는 것을 보았다. 다시 말해, 오늘날 여성의 재생산 노동은 상품 시장으로부터 사적 영역이라는 외부로 축출되어 공짜로 수탈되지는 않는 편이며, 점차 자본주의적 시장 내부로 포함되어 생산적 노동으로 착취당한다. 이는 대개 소수 인종의 빈곤한 이민자 여성이 상품화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 젠더 억압의 새로운 형태들을 낳았다. 소위 말하는 “세계적 돌봄 연쇄”와 여성 밀매의 성장은 이러한 발전의 젠더화된 효과 가운데 일부가 되었다(예컨대 Hochschild 2000을 참조).
존 톰슨(J. Thomson)의 목판화 < A female servant holds a small child whilst its fashionably dressed mother touches its face on her way out.>(1840)
이 여성화된 서비스 경제의 부상은 현재의 “돌봄 위기”와도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돌봄을 수행하는 자격 있는 돌봄 노동자들이 충분한 수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이 지적하였듯, 환경과 비슷하게 돌봄 노동은 시장 거래에서 완전히 붙잡을 수 없는 여러 중요하고 긍정적인 외부성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돌봄 노동은 경제적 관점으로부터의 돌봄 노동 상품화가 지닌 일정 한계들을 폭로한다. 예컨대 낸시 폴브레와 줄리 A. 넬슨 같은 경제학자들이 설명하듯, 아이들이 책임감 있고 전문적이며 다정한 성인으로 양육되면 많은 이들이 그 이득을 함께 누린다. 고용인들은 전문적이며 협조적인 노동자들로부터 이득을 보고, 노령 인구는 전문성 있는 젊은 노동자 세대가 세금을 많이 내면 이득을 보며, 이외에도 이득이 있을 것이다(Folbre and Nelson 2000). 문제는 이러한 이득을 만들어낸 이들을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부모는 성년에 이른 자신의 아이들을 고용한 고용인에게 요금을 요구할 수 없다. 이는 돌봄이 만들어낸 것들이 다른 외부성들과 마찬가지로, 무임승차를 할 유인, 다른 이들이 값을 치르게 할 유인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폴브레와 넬슨은 현재의 돌봄 위기를 시장만이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집단적인 협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돌봄제공자들이 자신의 서비스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기에, 돌봄은 최적의 양보다 덜 제공될 것이다. (…) 가족과 시장 공급 사이의 대체 가능성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 한계는 우리 사회가 논의하고, 규정하여, 강제해야 한다.” (Folbre and Nelson 2000, 137)
요약하자면, 우리는 자본주의적 경제 논리를 젠더적 노동 분업과 연결하는 두 개의 대립되는 방식(자본주의는 여성이 일하는 것과 집에 머무르는 것 모두를 원한다)을 포착할 수 있고, 두 유인의 사례를 모두 오늘날 찾아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여성이 자기 가정을 공짜로 돌볼 것이라고 기대하여 재생산 노동의 값을 외부로 축출하며, 동시에 돌봄 노동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 이를 내부로 포함한다. 다시 말하지만, 환경과 마찬가지로 두 선택지 모두 문제가 없지 않다. 재생산 노동은 상품화되지 않으면 무임승차의 문제가 생기고, 유료 서비스로 전환되면 돌봄 위기를 마주한다.[각주:3]결론에서 주장하겠지만, 이는 그저 자본주의의 더욱 사회민주주의적 형태를 옹호하며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젠더 억압 및 환경 파괴라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요청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변화는 더욱 급진적이어야 하며, 자본주의 자체의 핵심 논리에 도전해야만 한다.
자연의 실질적 포섭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두드러진, 내부로 포함하는 기제들 외에도, 나는 수탈, 즉 자연에 대한 무임승차의 기제들이 자연의 자본화를 위한 다른 독특한 기제들로 보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기제들은 (생물학적 기초의) 자연적 자산들이 상업적 착취에서 더욱 수익성이 있고 더욱 영향을 잘 받도록 함으로써, 생물학적 생산성을 조종하고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기제들은 윌리엄 보이드, 스콧 프루댐, 레이첼 셔만(2001)의 영향력 있는 글에서 자연의 실질적 포섭이라는 눈부신 형태로 이론화되었다. 노동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에 영감을 받아, 보이드와 그 동료들은 자본주의가 자연을 전유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들을 구분하기 위해 자연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이라는 개념을 정식화하였다.[각주:4]
자연의 형식적 포섭은 위에서 미즈의 저작과 관련되어 논한, 수탈 혹은 본원적 축적이라는 기제들과 대강 일치한다. 자연의 형식적 포섭 아래에서, 자본주의적 기업들은 천연자원에 접근하거나 천연자원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나, 이들은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자연을 통제, 극대화, 조작, 혹은 다른 식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Boyd, Prudham, and Schurman 2001, 562) 자본은 추출의 논리로 작동하고, 자연 세계를 생물 물리학적인 과정들과 물질적 특질들의 주어진 집합으로 대한다. 이러한 접근은 명확한 이점을 지님에도, 기업들이 자연의 여러 요구를 다루기 위해 스스로의 생산 전략을 조정해야만 하기에 일반적으로 축적에 방해가 될 뿐이다.
예컨대 자연적 생산 일정에 대한 의존은 노동과 기계의 지속적인 배치에 여러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게 자연의 실질적 포섭을 위한 기제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해지는 이유이다. 자연의 실질적 포섭은 자본이 생산상의 난관을 극복하고, 경쟁상의 이점을 취하며, 수익성을 늘리기 위해 생물 물리학적 과정을 의도적으로 변경하기 위해 취하는 전략들을 가리킨다.추출의 논리는 생물학적 생산성 자체를 증진시키려는 논리로 대체된다. “기대되는 결과들은 (…) 더 높은 수확량, 더 짧은 순환 시간, 개선된 질병 저항성 등이다. 요컨대 자연은 더 열심히, 더 빨리, 더 낫게 일하도록 (다시) 만들어진다.”(Boyd, Prudham, and Schurman 2001, 564)
자연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 간 차이를 다루는 상세한 예시는 다시 조림 산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자본주의가 핀란드의 사례가 보여주듯 오래된 삼림의 방대한 벌목과 뒤따르는 삼림 파괴로 특징지어진다면, 오늘날 기업과 국가 기관은 산림 성장이라는 생물학적 기초에 개입하고자 한다. “나무를 ‘이미 만들어진’ 대상으로 보는 대신, 플랜테이션 조림학 논리는 나무의 성장 과정에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그 자체를 변경하는 것을 포함한다.”(Boyd, Prudham, and Schurman 2001, 566) 조림 산업은 이제 나무를 베고 목재를 추출하는 것만 포함하지 않고, 화학 비료 및 살충제의 사용, 묘목 재배를 위한 집중적 묘목장 운용, 손과 기계를 통한 나무 심기, 유전 형질의 직접적 조작까지 포함한다(566).
자본에 의한 자연의 실질적 포섭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은 그 확장과 극대화를 위해 전례 없는 수단들을 제공하였다. 오늘날의 생명 자본주의에서, 생명공학은 기후 변화, 저렴한 에너지 공급의 종말, 인구 노령화같이 자본주의적 축적을 방해하는 난점들을 해소하는 열쇠로 이해된다. 형식적 포섭의 경우 단지 천연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확립함으로써 수익성이 증대되었으나, 자연의 실질적 포섭은 자연 그 자체보다는 생명공학적 지식의 사유화와 상품화를 필요로 한다(Boyd, Prudham, and Schurman 2001, 564). 오늘날 천연자원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복잡한 생명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각주:5]
우리가 다시 여성 재생산 노동의 자본화에서 상응하는 발전을 조사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면, 자연의 실질적 포섭은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보조생식기술의 부상이 인간 생식의 생물학적 과정을 근본적으로 변경하는 이 기술의 능력으로 인해, 여성 재생산 노동을 착취할 기회를 뒤바꾸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여성의 생물학적 재생산 노동은 가치증식과정이라는 자본주의적 순환과 전적으로 유리되어 일어난 적이 없다. 예컨대 노예 번식이라는 실천은 노예 소유주의 부와 노동력을 늘리는 수단으로서 노골적으로 채택되었다(예컨대 Davis 1972). 그러나 보조생식기술이 있는 오늘날, 인간의 재생산이라는 생물 물리학적 과정은 새로운 종류의 세계 생식력 시장의 탄생을 가능케 한 방식들에 따라 변경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한 규모를 제공하는 것은 어렵지만, 인색하게 추산해도 상당하다. 어떤 추산들에 따르면 초국적 대리모를 위한 세계 시장의 규모만 해도 세계적으로 연간 60억 달러라고 한다(Smerdon 2008. Mohapatra 2014, 147에서 재인용).
보조생식기술은 재생산을 임신을 통한 유전적 모성과 섹스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킴으로써, 인간 재생산의 과정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었다. 체외 수정과 자궁 내 인공수정이 수정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이성애적 삽입 행위는 이제 필요하지 않다. 이 기술들의 상업화는 부모가 되려는 이들이 스스로 수정을 할 수 없다면, 생식 세포에 대한 시장 접근을 통제하는 중개자를 통해 정자와 난자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가 되려는 사람이나 기증자의 난자가 아버지가 되려는 이의 정자나 기증자의 정자와 수정되는 것이다. 유전적 어머니가 태아를 만삭까지 밸 수 없다면, 배아를 대리모의 자궁에 이식하여 태아를 만삭까지 잉태하게 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다시금 생명공학적으로 조정될 것이며, 시장의 중개자들에 의해 점차 조직될 것이다. 상업적 진료소들은 대리모를 심사하고 고용할 것이며, 이들의 자궁 내막이 배아 이식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킬 것이다. 이 준비에는 매우 긴 의료적 조치들과 복잡한 약물 요법을 수반한다.[각주:6]
고로 대리모 역할의 여성의 신체와 재생산 능력은 자본주의적으로 전유되나, 외부적 천연자원으로 전유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리 임신은 자본에 의한 자연의 실질적 포섭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본은 생물학적 재생산을 쥐고 뒤바꾸어, 자본 축적을 위한 새로운 시장들과 새로운 형태들을 창조할 근원으로 삼을 수 있다. 대리모들의 신체는 착취가 가능한 자연으로 효과적으로 생산되며, 정교한 생명공학적 과정은 물론 가치증식과정이라는 자본주의적 순환 속에서 필수적인 요소들로 변한다. 대다수 여성의 재생산 노동과 달리, 대리모들의 재생산 노동은 완전히 자본화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 생태정치
나는 오늘날 페미니즘이 오직 세계 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서만 비판적 관점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삶과 정치 사이 관계의 새로운 윤곽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확장과 긴밀하게 엮여있다. 생명 자본주의의 틀 밖에서 생명과학과 그 생명공학에서의 적용상의 급속한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세계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 없이 오늘날 환경 위기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옹호하는 페미니스트 이론화는 자본주의 비평의 형태를 취한다. 자본주의의 체계적 특징들, 그 내재적 경제 논리나 운동 법칙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원칙이 있다는 것을 페미니스트 이론이 인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축적이라는 최우선적 목표나 경제 성장이라는 원칙이 중요하게 포함되며, 미시적 차원에서는 서로 경쟁하고 이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개별 기업들의 원칙이 포함된다. 이러한 목표들은 이후 노동의 저렴화와 시장의 팽창, 노동 생산성의 지속적인 발전 동력, 상품 디자인에서의 혁신 등의 원칙들까지도 설명한다.
자본주의 이론가들 대부분은 각인되어있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 구조적 맥락에 따라 이러한 원칙들이 개조되고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들을 취할 수 있다고 주장함에도, 이러한 원칙들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우세한 사회에서 경제적 · 정치적 활동에 가해지는 독특한 제약들을 부과한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원칙들이 상당한 설명력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원칙들과 그 설득력 있는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예컨대 세계 재생산 시장 같은 많은 정치적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의 튼튼한 틀을 페미니스트 이론에 제공한다. 인도는 날씨가 화창하여 대리모 진료소가 번창하지 않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이론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적이고 총계적인 생각을 가지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 자본주의 분석은 서로 다르고, 때로는 모순적임에도 자본 축적이라는 기저 논리와 양립할 수 있는 기제들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복합적이어야 한다. 자연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은 물론 외부로의 축출이라는 기제와 내부로의 포함이라는 기제를 구분함으로써, 여성 재생산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전유와 자연의 생산 사이의 기능적 유사점들에 관한 이론적으로 더욱 암시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내 목표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 주된 동기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동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을 인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기제들 가운데 일부가 단기적으로는 여성, 환경, 개발 도상국에 부정할 수 없이 좋은 것으로 보이더라도, 그러한 사실이 자본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평의 근본적 중요성을 무효화하지는 않다는 것을 그러한 인지가 암시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페미니즘과 환경 보호주의 사이의 정치 동맹이 때에 따라 별개의 정치적 목표들을 공유하는 친연성의 정치의 한 사례가 아닌 이유는 이제 명확할 것이다. 오히려, 페미니스트들과 환경 보호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이라는 공통의 정치적 목표를 공유한다는 것이 내 주요 주장이다. 먼저, 둘 모두 내가 위에서 설명한 시장 내부로의 포함 및 외부로의 축출 과정 사이의 경계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협상되는지 질문하는 시급한 프로젝트를 공유한다. 예컨대 대리모의 사례가 명확히 드러내듯, 생물학적인 생명이나 “자연”의 서로 다른 과정들이 시장 영역 안으로 포함되는지, 아니면 이 과정들의 적절한 장소가 시장 영역 밖으로 간주되는지 여부는 오늘날 중요한 정치적 문제이다. 이는 그러한 과정들에 대한 평등한 접근과 정치적 통제에 관한 시급한 정치적 질문들에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 도덕적 의미와 가치를 지정하는 데 근본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생명공학적으로 생산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팔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상품화의 한계를 협상하는 것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바탕에서 시장에 한계를 부과할 것을 요구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프로젝트이다.
둘째로, 자연의 실질적 포섭은 위험, 권리, 책임에 관한 골치 아픈 정치적 질문들을 제기한다. 새로운 생명공학의 적용을 포함한 자연의 실질적 포섭에 각인된 문제는 그러한 기술들이 예측할 수 없는 환경적, 의료적 결과는 물론, 전례 없는 위험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에는 슈퍼 잡초나 바이러스 및 박테리아의 악성 변종들 같은 새로운 생명체의 잠재적인 탈출이나 증식을 포함할 수도 있으며, 호르몬 주사를 통한 난소의 과자극이나 의무적인 제왕절개 출산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이러한 위험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렇듯 심각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은 누가 이러한 위험을 짊어지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보상을 제공해야 하는지에 대해 성가신 정치적 질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재차 말하지만, 이 문제는 생명 자본주의에 반대하여 페미니즘과 환경 보호주의를 하나로 묶는 정치적 투쟁의 절박한 필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셋째로, 상품화의 한계와 자연의 생물 물리학적 조작에서 발생하는 위험성이라는 이 두 가지 문제는 더욱 넓고 깊은 정치적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내 분석이 맞다면, 페미니즘과 환경 보호주의 모두 “외부성들”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제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데 관심을 지녀야만 한다. 페미니스트 및 환경 보호주의적 경제학에서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이러한 연구 분야들은 자신의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었다. 환경과 여성의 재생산 노동은 화폐로 주조되고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의 순환 안으로 완전히 포함될 수 없는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 이는 환경과 여성의 재생산 노동이 상품 교환이라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계속해서 평가절하되고 약탈당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행성의 경제적 가치가 무엇이며, 자기 자식의 생명에 무엇을 바칠 용의가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해보면, 수량화할 수 없는 것을 화폐로 주조하려는 시도의 무용함은 명확해진다. 즉, 페미니스트 생태정치는 이윤, 소비자 선호, 경제 성장 외의 가치가 주목 받을 기회를 지니는 경제 체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인지에서 시 작하여야 한다.
요약하자면, 21세기에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적 시장 밖 어딘가에 외부적 자연을 보존하는 데 그치는 환경 정치의 형태를 고수할 선택권을 이제 지니지 못한다. 오히려, 목표는 더욱 급진적이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 그리고 생명을 그 가치 순환 속으로 흡수하기 위해 사용되는 다중적 기제들에 도전해야만 한다. 자유 시장의 규제와 자원의 더욱 공정한 재분배를 요구하는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요구는 내가 여기서 그리는 페미니스트 생태 정치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나, 그러한 정치적 요구들은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계급 투쟁으로 포괄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페미니스트 생태정치를 위한 포용적 운동은 일, 경제적 해방, 계급 투쟁, 생산주의의 이데올로기 위에 건설될 수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문제 삼는 것은 이제 다른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 · 경제적 관계 탓만은 아니며, 우리가 비인간 세계에 초래하는 셀 수 없는 파괴 때문이다.
- 끝.
유럽 탄소 시장의 심각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예컨대 Klein 2014, 224–25를 참조. [본문으로]
예를 들어 Aho 2016 참조. 어린 숲이 탄소 흡수대로 더욱 효율적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견해로는 예를 들어 Ilmasto.org 2008 참조. [본문으로]
이는 개별 여성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성에 관한 상충하는 요구들 사이에서 점차 찢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Oksala 2011 참조. [본문으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을 통해, 마르크스는 자본이 이미 존재하는 노동 과정을 장악하고 이용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그 연장으로 노동자들 자신도 변화시키는 방식을 가리켰다. 이는 노동일의 연장보다는 주로 노동 생산성의 증가에 기초하여 잉여가치가 추출되는 자본주의 형태로의 역사적 이행을 폭로하는 데 매우 중요하였다. Marx 1976, 645(맑스 2019, 834-835)과 1019–38 참조. [본문으로]
킨 버치와 데이비드 타일필드는 오늘날 생명경제 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사유재산권이 지식 자산의 소유와 관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물질적 사유재산권으로부터 시장 교환을 통해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이 부문의 수익성에서 중요한 문제이다(Birch and Tylefield 2012, 316). [본문으로]
초국적인 상업적 대리 임신에 관한 페미니즘적 설명으로는 예를 들어 Pande 2009; Bailey 2011; Vora 2013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