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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스피노자 읽기

네그리, 『스피노자와 우리 시대』 2장 역능과 존재론: 하이데거 혹은 스피노자

by 인-무브 2025. 4. 15.

스피노자와 우리 시대

정치와 탈근대 5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
번역: 연구공간 L 기획, 주현‧이승준 옮김

 

 

2장 역능과 존재론

하이데거 혹은 스피노자

 

 

실재적인 것, 또는 헤겔이 근대라고 부른 것은 형식과 변증법에서 본질과 실존, 그리고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이다. 즉 당신이 놓인 곳은 거의 2세기 동안 철학적 비판이 진전을 이루기 위해 분투해 온 폭풍우 치는 곶(cape)이다. 마치 헤겔이 이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대의 독일 철학의 은의 시대 동안, 그리고 나아가 동의 시대(19세기와 세기말의 “비판적 비판”과 위대한 보편철학의 시대)에, 본질과 실존, 실체와 역능(독일어로는 현실성Wirklichkeit과 현존재Da-Sein)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한때 유효한 실재로 여겨졌던 실체는 권력과 숙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역능은 이제 마찬가지로 한때는 적대로 경험되었던 비합리의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철학은 점차 숭고함의 전시, 즉 비합리적인 것을 몰아내는 방법으로 변형된 반면에, 역능은 그저 조작되었을 뿐이다. 첫째, 한편에는 위기와 비극적인 사유의 지평이, 다른 한편에는 절대적 실체의 변증법적 헤게모니를 근간으로 삼는 열렬한 헤겔적 충동이 있는 이원론이 정립되었다. 그런 다음 철학은 다소간 변증법적 방식으로 모든 낡은 초월론적 목적론을 쇄신하는 영원한 소임을 떠맡았고, 그래서 마르크스와 니체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통렬한 반어법으로 그러한 목적론을 겨냥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계속해서 다른 이미지에 뒤이어 근대의 한 이미지—두 이미지 모두 가식적이지만, 이전의 이미지보다 훨씬 더 힘없는 그러한 이미지—를 그것의 변화하는 지평에 투사했다.

 

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의 헤게모니는 절대자에 대한 헤겔의 유토피아, 다시 말해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승리에 대한 그것의 고유한 표상을 낳고, 그것을 개혁주의적 목적론에 덧씌운다. 변증법적 무한(infinite)의 도식과 겨루는 무한정한(indefinite) 지속의 도식은 진보적인 권력의 합리성을 위한 기획으로 되살아난다. 역사의 끝은 역사의 합목적성이 된다. 근대는 침대보는 갈지만 침대는 그대로 둔다. 철학의 진보는 멈칫거리고, 사상의 모든 진정한 쇄신의 가능성을 차례로 소진하고, 매우 건조하고, 환영적이며, 그-자체로-확실하고, 매우 유토피아적인 근대에 대한 헤겔의 암시 등을 우회하기 위해서 수천 가지 방책을 움켜잡고, 그것을 이성 및 초월성의 도식론이라는 낡고 해진 형태로 대체한다. 이러한 성찰이 스스로를 소진하고 그 자신의 공허(vacuity)를 바로 그 존재 정의에 흘러 들어가게 하는 지점까지 그렇게 나아간다.

하이데거는 이 과정의 극단을 대표하며, 어떤 점에서도 이 과정에 낯설지 않다. 실제로 칸트의 초월론적 도식론의 재정식화가 󰡔존재와 시간󰡕의 목적 중 하나로 대담하게 선포된다. 그러나 그가 이 익숙한 주제를 다시 작업하려고 시작하는 그 순간, 그의 반복은 이 과정을 완전히 요동치게 만든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체적으로 정리작업하는 일이 이 책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모든 개개 존재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 책의 잠정적인 목표이다.”[1] 그러나, “존재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과제가 될 경우 현존재는 일차적으로 물음이 걸려야 할 존재자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각기 이미 그의 존재에 대해서 바로 이 물음에서 물음이 되고 있는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존재자이다. 이 경우 존재물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현존재 자체에 속하여 있는 본질적인 존재경향, 즉 존재론 이전의 존재이해의 근본화인 셈이다.”[2]

 

그러므로 현재 시간 및 그것이 존재와 맺는 관계라는 주제, 따라서 현재 시간의 특이한 유효성이라는 주제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헤겔이 구축하려 했던 것과는 다르게, 현존재는 분열된 시간성이며, 그에 따라 모든 면에서 현존으로 재발견된다. 즉 세인(世人/Man)의 분산된 일관성과는 다르게, 그리고 어떤 종류의 방향상실과도 다르게, 안정성과 특이한 뿌리내림(rootedness)인 현존으로 재발견된다. 생성과 역사는 이제부터 상업과 허약함의 숙명에 지나지 않는다. 유효성은 더 이상 헤겔적인 현실성(Wirklichkeit)이 아니라 무례한 현사실성(Faktizität)이다. 근대성은 숙명이다. 󰡔존재와 시간󰡕의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하이데거는 헤겔의 매개 및 절대정신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현사실적으로 내던져져 있는 실존 자체의 ‘구체화’에서 시작하여, 실존을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시간성을 밝혀 보였다. ‘정신’은 이제야 비로소 시간 안으로 떨어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시간성의 근원적인 시간화로서 실존하고 있다. … ‘정신’은 시간 안으로 떨어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사실적 실존은 빠져 있는 실존으로서 근원적인 본래적 시간성에서부터 [이미 시간 안으로] ‘떨어진다.’”[3]

 

여기 이러한 떨어짐에서, 이러한 “염려”에서, 시간성은 미래로의 가능성이자 자기-투사로 구성된다. 시간성은 목적론과 변증법의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않고 현존의 가능성을 현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론적 규정으로 드러낸다. 오로지 현존 속에서만 숙명은 가능성과 미래로 새롭게 열린다. 그러나 현존재를 진정으로 증명할 방법은 무엇인가? 이 비극적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적절하고 진정한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죽음은 또한 현존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현존재의 가장 적절하고 진정한 규정이 된다. 그렇다면 헤겔의 근대성—존재와 시간의 종합, 현실성과 현존재의 종합—이라는 근본적인 주제는 이제 종결되었다고 결론짓기가 쉽다. 아니 더 올바르게는 그것이 역전되었다고 결론짓기가 쉽다. 본질과 실존의 직접적인 통일성이 발생하는 곳은 무에서, 죽음 속에서이다. 특이성의 역사적 규정(Bestimmung)에 관한 헤겔의 주장은 결단(Entschlossenheit)이 되었다. 즉 현존재가 그 자신의 진리인 무 쪽으로 열리는 숙고(deliberation)와 해결(resolution)이 되었다. 규정과 초월론적인 것을 춤추게 했던 작은 선율은 이제 끝났다.

 

따라서 헤겔과 하이데거와 함께 우리는 삶에 대립하는 두 가지 경험을 갖는다. 변증법의 힘 안에서 그 자신의 실존 가능성을 강조한 이후에, 부르주아적인 행복의 소유는 그것이 일관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방향전환(kehre)를 따르는 후기 하이데거조차 이러한 상황을 교정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헤겔과 하이데거 사이의 거리는 이보다 더 클 수 없으며, 이는 하이데거와 모든 근대철학과의 거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하이데거는 전혀 그렇게 고립되어 있지 않다. 그는 단지 근대성의 숙명에 대한 예언자가 아니다. 그의 기능이 종료되는 바로 그 순간, 하이데거는 반근대성을 열 수 있는, 존재론적으로 구성적인 관계로서의 시간관을 의미하는 진입로(portal)를 대표한다. 이러한 시간관은 근본적으로 실체와 초월론적인 것의 헤게모니를 파괴하며, 그것을 반대로 일종의 역능으로 개방한다. 이론적 결단은 ‘닫힘(closure)을 긍정’(Entschlossenheit)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를 현존재 안에서 드러내는 한에서 진리 자체인 기대(anticipation) 및 개방과 관련된다. 존재의 발견은 단지 미리 실존하는 것을 탈은폐(Ent-decken)한다는 사실 그 이상을 의미한다. 즉 그것[존재의 발견]은 세인의 분산적 이동성을 통해 그리고 그에 맞서 현존재의 자율적 안정성을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유한함 안에서, 현존재는 열리고 이 열림은 봄(Sicht)이지만, 봄 그 이상으로서의 둘러봄(Umsicht), 즉 주변 360°를 돌아보는 것이자, 또한 실제로 미리 돌아봄이다. 현존재는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그 이상으로, 존재의 힘이다. “‘우리’는 진리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현존재의 존재양식으로 존재하면서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4]

 

그리고 다시,

 

그러나 현존재—그는 염려로서의 존재구성틀 안에 놓여 있다—는 각기 그때마다 이미 자기를 앞질러 있다. 현존재는 그에게 그 존재에서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존재-의-역능]이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존재자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와 존재가능[존재-의-역능]에는 본질적으로 열어밝혀져 있음과 발견함이 속한다. 현존재에게는 그의 세계-내-존재-가능[존재-의-역능]이 그리고 그 안에서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를 둘러보며 발견하면서 배려함이 문제가 된다. 염려로서의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즉 자기를 앞질러 있음에 가장 근원적인 “전제”가 놓여 있다.[5]

 

그렇다면 현존은 단지 진리 안에 주어진 존재의 사실만을, 숨겨지지 않는 존재의 성격만을 의미하지 않고, 현재의, 진정성의, 존재의 새로운 뿌리내림의 투사를 의미한다. 시간은 역능을 갈망하고, 그것의 생산성을 암시하며, 그것의 에너지와 맞붙는다. 그래서 시간이 무(無)로 다시 접힐 때,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능을 망각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우리는 스피노자로 돌아가 이 암스테르담의 철학자를 하이데거와 연결시키는 대항-직관적인 작업을 시도해볼 것이다. 템푸스 포텐샤이(Tempus potentiae). 현재에 대한 스피노자의 강조는 하이데거가 단순한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부여한 것을 실행한다. 생성과 직면한 특이한 현존의 헤게모니—이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헤겔의 형이상학과의 비교되는 것으로 특징짓는다—는, 하이데거의 텅 빈 현존에 맞서는 현재의 존재론적 풍요의 헤게모니로서 재긍정된다. 스피노자는 근대성에 발을 들이지 않은 채 여기서는 시간의 집중—헤겔과 하이데거가 생성에 있는지 무에 있는지를 결론짓고 싶어했던—을 긍정적으로 열려있고 구성하는 시간으로 역전시키면서 단번에 근대성에서 빠져나온다. 이러한 절대적 내재주의의 존재론적 조건 속에서 사랑은 “염려”를 대신한다. 스피노자는 하이데거를 체계적으로 뒤집는다. 그는 불안(Angst)에 사랑(Amor)을, 둘러봄(Umsicht)에 정신(Mens)을, 결단(Entschlossenheit)에 욕망(Cupiditas)을, 현존(Anwesenheit)에 코나투스(Conatus)를, 배려(Besorgen)에 욕구(Appetitus)를, 가능성(Möglichkeit)에 활력/포텐샤(Potentia)를 대립시킨다. 이 대립에서 현존, 반-목적론, 가능성은 존재론의 다른 의미들이 나누는 것을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의 의미는 이분법을, 즉 하이데거에게서는 무(無)를 향하는 존재, 스피노자에게서는 충만을 향하는 존재라는 이분법을 겪는다. 진공을 향해 동요하는 하이데거의 모호함은 현재를 풍부함으로 생각하는 스피노자의 긴장으로 해소된다. 하이데거처럼 스피노자도 현상학적 존재[l'étant phenoménologique]를 의미하는 양태의 현존이 해방으로 넘어간다면, 하이데거와 달리 스피노자는 이러한 존재 안에서 생산적 힘을 지각한다. 따라서 시간의 현존으로의 환원은 다음과 같은 대립적인 방식으로 수행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현존의 구성이 무를 향해 나아간다면,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는 현존에의 창조적 지속성(insistence)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존으로의 환원을 통해 두 가지 상이한 구성적 방향이 그 지평을 차지한다. 하이데거가 근대성과의 화해를 설명하는 것과 달리, 스피노자 즉 근대 안에서 살았지만 결코 근대 철학에 들어가지 않는 스피노자는 완전히 미래를 향해 투사된 반-근대성의 불굴의 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사랑은 역능의 시간을 표현한다. 즉 영원을 구성하는 능동으로서의 현존인 시간을 표현한다. 아주 어렵고도 아주 문제적인 『에티카 5부의 서론에서조차, 우리는 이 개념적 과정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현존과 영원의 동일성이라는 형식적 조건이 주어진다. “정신은 영원의 상 아래에서 이해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신체의 현재의 현실적 실존을 생각하는 덕분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상 아래에서 몸의 본질을 생각하는 덕분에 이해한다.”[6] 이것은 정리 30에서 반복된다. “우리의 정신은 그것이 영원의 상 아래에서 자기 자신과 신체를 아는 한,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앎에 이르고 그래서 자신이 신 안에 있음을, 신을 통해 인식된다는 것을 안다.”[7] 이와 관련된 설명은 정리 32의 결론에 있다. “제3종의 인식에서는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생긴다. 이 제3종의 인식에서 원인으로서의 신 관념 즉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동반되는 기쁨이 발생한다. 이 사랑은 우리가 신을 현재로 상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신을 영원하다고 이해하는 한에서 신에 대한 사랑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다.”[8]

 

따라서 영원은 현존의 형식적 차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설명과 하나의 전도를 제공받는다. “이러한 신을 향한 사랑이 비록 어떤 시작도 갖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마치 그것이 발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랑의 모든 완전성을 갖는다.”[9]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의 덫에 빠진다는 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일반적 의견에 주의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그들 정신의 영원성에 대해 의식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이 영원성을 지속과 혼동하고, 영원을 그들이 죽음 이후에도 남아있다고 믿는 상상이나 기억에 귀속시킨다는 것을 알 것이다.”[10] 그와는 반대로, “정신의 이러한 사랑은 정신의 활동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실제로 정신이 원인으로서의 신 관념에 의해 동반된다고 자기 자신을 고찰하는 활동 자체이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한에서, 신이 자기 자신의 관념과 함께 스스로를 관조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이러한 사랑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이다. 이상이 내가 증명하려는 바이다.”[11] “지금까지 얘기된 것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 지복 또는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즉 그것이 신을 향한 변함없고 영원한 사랑 또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에 있음을 분명히 이해한다. 이 사랑 또는 지복은 성서에서는 영광(glory)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과분한 것이 아니다.”[12] 스피노자의 주장은 모든 모호함을 넘어서 정리 40으로 결론지어진다. “각 사물이 더 완전한 것을 소유할수록 더 많이 작용하고 더 적게 작용받는다. 역으로 각 사물이 더 많이 작용할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완전하다.”[13]

 

따라서 역능의 시간은 구성적 행위가 현존 안에 내재하는 한 영원을 구성한다. 여기에서 전제된 영원은 하나의 산물로, 긍정과 행동의 지평으로 드러난다. 시간은 사랑의 충만함(plenum)이다. 하이데거의 무(無)는 스피노자의 충만함, 즉 현재 세계의 영원과 풍요(plenitude)의 역설, 특이성의 찬란함(splendor)과 만난다. 근대성 개념은 실제로 부식되지만, 그것은 “염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와 스피노자 사이의 접점 혹은 공통점이 추론될 수 있다. 우리는 니체가 전 세계에 제시했던 것처럼 그 둘 모두가 근대성의 신화를 산산조각내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것이 어쩌면 서로 다를 수 있는 두 저자들이 가진 공통점, 즉 근대성의 파열이다. 이 공통의 차원, 즉 공통의 인식과 경험을 통한 이러한 이행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환원불가능한 유사성을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

 

스피노자와 하이데거가 존재론적 영역에 관여하는 공유된 자기 성찰의 첫 번째 요소는 존재를 근본적으로 함께-있음(mit-Sein)으로 긍정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우리는 두 철학이 지닌 공통 단계와 만난다. 둘 모두에게 존재는 그 자체 함께-있음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 함께-있음을 사소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있음은 모든 우발적 관계에 투여되는 동시에 언어적 순환의 다양한 형상에 투여된다. “약한” 철학도 “언어” 철학도 실제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이성이 낙하하는 환경, 즉 실존의 현상학적 조직망은 실제로 단단한 관계의 조직망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존재 경험에서 현기증나는 존재 인상을 갖는다. “함께-있음”은 타자성을 향할 뿐만 아니라 심층을 향하는 연속적인 개방, 두 철학이 드러내는 소진되지 않는 심급이다. 후설은 이미 함께-있음에서 이러한 개체성의 몰입을 묘사한 바 있으며, 함께-있음으로부터 개체성은 특이성으로 출현한다. 후설에게서 이러한 차원은 생기론자로 간주되는(혹은 고발되는) 특정한 측면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바로 여기에서 존재로의 낙하라는 현상학적 조건이 존재를 삶정치적 형상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존재를 비오스(bios)와 연결할 때에는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즉 비오스에 대한 무수한 오해가 빚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러한 오해는 우리가 이 지점까지 도표화했던 것—공허와 충만, 무와 역능, 죽음과 삶의 양자택일—과 동일하다. 이는 하이데거와 스피노자의 관계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스피노자에서 있어서 존재는 그의 연구가 “다중-임”이나 “다중-만들기”를 향하는 경향이 있을 때 삶정치적 형상을 띤다. 여기서 존재는 생산적이고 절대적인 내재성이며, 가장 깊은 심층은 실존의 표면이 된다.

 

이러한 존재 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하나의 인상을 남긴다. ‘근본적 스피노자주의 없이는 철학도 없다’는 헤겔의 말을 기억해보자. 우리는 ‘하이데거주의 없이는 철학도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가? 그러한 주장은 탈근대의 바로 그 경험에, 탈근대의 표현 혹은 정의에 새겨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주장을 넘어서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덧붙이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 즉 하이데거에게 존재가 스캔들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특징지어지는 반면, 스피노자에게 존재는 역능과 희망으로, 생산할 수 있는 존재론적 능력으로 근본적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반동적인 파시스트인 하이데거 대 민주주의적이고 코뮤니즘적인 스피노자의 대결인가? 그러한 조잡한 구도는 스피노자를 부적절하고 비역사적으로 특징짓는 반면, 하이데거에게는 그가 이미 짊어지고 있는 (논박의 여지없는) 죄책감을 짊어지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정확히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역사학적 난점을 조명하고,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고 하이데거를 (반동적인 자로) 해석하는 역사와 관련해 그러한 역사학적 난점을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함께-있음 안에 있는 존재는 현재의 철학 안에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현대철학의 거대한 분기점이자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후설과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있다. 생기론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분석에 의해 구성된 신비주의적 관점과 후설 철학에 의해 구성된 금욕주의적 관점이 그것이다. “함께-있음”의 내재성과 “안에-있음”의 내재성이 긍정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자택일을 통해서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시간에 몰두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시간으로의 추락의 직접성을 완화시키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뿐이다. 우리를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은 차이의 감각(특이성들 간의 관계)뿐이다. 차이의 감각 자체는 상호작용에, 즉 “함께 있음”과 “안에 있음”에서 작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이데거와 스피노자는 다른 선택을 하는데, 이는 니체가 그의 사상의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구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삶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의 집착 중에서, 특이성의 기쁨과 총체성의 기쁨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회귀에 반대하는 죽음을 증오할 수 있으며, 정치적인 것의 초월성에 반대하는 다중을 경험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심대한 역사적 불확실성의 시기에 만들어진 이러한 다른 선택이, 그 이후에 탈근대성이 제시할 역사적 규정 및 정치적 대안에 얼마나 상응하는지의 여부이다. 실제로 스피노자와 하이데거는 “자본 아래로의 사회의 실재적 포섭” 내에서 사고한다. 그것이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이론적 허구의 문제, 상상의 기획의 문제라면, 반대로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역불가능한 경향이다. 둘 모두에게 있어 이러한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없다. 그들 각자의 철학이 더 이상 “외부”가 없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하이데거가 종종 동요한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그를 미지의 지대로 이끌고, 존재 경험 내에서 신비로운 긴장을 강조하는 이러한 숙명의 호소, 즉 운명애(Amor fati)에 주의를 기울인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다. 그의 시대, 그의 정신은 민주주의 혁명에 열려 있었고, 또한 그를 해방, 따라서 행동 및 실천의 선택을 향해, 상호작용을 다양성으로 변형하고 다중을 민주주의로 변형하는 능력을 향해 밀어붙였다. 따라서 우리는 현상학의 두 노선(현상학적 맥락 “안에 있음”의 노선과 “함께 있음”의 실험 노선)이 교차하고 모순적인 전체—다른 선택지에 의해 분열된 전체—를 구성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우리는 한편에 인간 활동을 추상적 노동으로 파악하며, 인간을 삶이 권력—삶의 자유를 숙명의 산물로 변형시킴으로써 삭제하는 권력— 아래로 포섭되는 것에 책임이 있는 자로 파악하는 하이데거를 갖는다. 다른 한편에 우리는 노동에 대한 유물론적 재전유의 사상, 권력의 총체성을 파괴하는 사상을 구축하며, 민주주의적 구성을 예언한 스피노자를 갖는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해방은 욕망의 바로 그 생산물이다.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그들은 선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거기에는 부나 가난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비참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욕망은 해방을 구축하며, 그는 이러한 해방으로 선을 정의하는 반면 악은 해방의 박탈의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이제는 반대 방향에서 우리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바로 그 자유가 그를 선택의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다고 주장하는 하이데거를, 자유는 늘 초과이며, “함께 있음”은 마치 인류가 새장에 갇히기라도 하는 양, 인간들을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이데거를 둔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쿠피디타스는 결코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는 그것이 자신을 역사로 구성할 때 그 자신의 척도를 구축하는 존재의 흘러넘침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자유는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내재성 및 “내부”의 배타적 지평 안에는 “현상학적 존재”[원문에는 “l’être phénoménologique”로 표기되었다]의 두 가지 다른 형태가 있다. 한편에는 이러한 존재의 구축으로서의 이성과 정동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스스로를 소외와 무로 드러내는 존재에 대한 예속/주체화의 경험으로서의 결단(Entschlossenheit)과 “염려”가 있다. 한편에는 구축된 것, 기획적인 것, 역사적으로 규정된 것이, 다른 한편에는 근원(Ur), 탈은폐, 무가 있다.

 

이러한 대립보다 더 탈근대적인 것을 파괴하는 것은 없다. 비록 스피노자가 현상학적 차원을 근본적으로 고려하는 데 있어 하이데거와 뜻이 같을지라도, 그가 현재적 존재 안에서, 즉 삶의 “양태성”으로서의 그러한 존재 안에서 존재의 역능을 발전시킬 때에는 하이데거에 대립해 있다. 니체가 이 대안의 깊이와 역능을 이해했던 정도가 다시 한번 강조될 만하다. 사실상 하이데거는 본질적으로 그가 니체로부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망치질(battering)”을, 반작용적인 선택에서 전형적인 보수적 사상과의 이 놀아나기(flirtation)를 빌려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생각한 것과 달리 니체에게는 반작용을 향해 밀어붙이는 것이 없다. 어쨌든 파괴적이고 아이러니한 니체와 미소 짓고 유머러스한 스피노자를 대조시키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했고 실제로 나 자신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놔두자. 아이러니 대 유머, 즉 자연/물질(지금은 그 필요성이 제거되고 열정과 냉정에 비극적으로 열려 있는) 대 “신중하게” 구축하고 실행한 심지어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가는 자연 … 이러한 대립은 어느 정도 유용하고 옳은가?

 

하이데거와 스피노자를 대조시킨다면 문제는 다르게 나타난다. 내가 말했던 것 그리고 내가 20세기 철학 내에서 커다란 균열을 보는 방식을 요약해 보자. 한편으로 하이데거와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땅으로의 귀환을, 초월적이거나 초월론적인 모든 환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존재가 우리 즉 존재를 구성하는 우리에게 속하며 이 세계가 인간관계의 조직망이라는 인식을 제안한다. 이것은 생기론인가? 생기론은 여러 형태를 띤다. 첫째, 존재 분석을 시작하는 환경과 차원을 만들고, 삶 안에서의 존재가 진리 안의 존재, 진리의 환영 안에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는 환상으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생기론이 있다. 둘째, 딜타이에서 후설로 이어지는 생기론이 있는데, 그것은 주체를 역사적 존재로 현상학적으로 하강시킬 필요성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기론은 이미 생기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생기론은 사건과 인식론의 측면에서, 현존재의 특이성을 포착하는 삶 안에 있는 존재 개념에 더 가깝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존재의 과정을 철저하게 연구했고 하이데거는 그것의 의미를 파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이데거와 스피노자 사이의 가능한 접속점을 과도한 유사-근접성으로 조사했다. 이것은 우리가 하이데거의 사상을 반동적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이데거 사상이 나치 운동 및 파시스트 정치의 우여곡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존재 개념이 숙명을 삶을 질식시키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검은 뱀이며 그는 우리를 목 졸라 죽인다.

 

스피노자의 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또한 하이데거의 사상이 해석하거나 드러내는 인간 종의 어리석음에 대한 어떤 신중한 성찰의 정식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이데거에 맞서 인간 삶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어떤 차원으로서의 함께-있음의 관점을 설정하게 허용한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삶의 신중함을 필요로 하는 것일지 모른다.



[1]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p. 1. English translation from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 Joan Stambaugh (Albany: SUNY Press, 1996), 영역본은 여백에 1927년 판본의 페이지번호를 제공하며, 아래의 인용은 그에 따랐다. [한글본]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 이기상 옮김, 까치, 2003, 13쪽.

[2] Heidegger, Sein und Zeit, pp. 14–15. [한글본]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 31-32쪽.

[3] Heidegger, Sein und Zeit, pp. 435–436. [한글본]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 565쪽.

[4] Heidegger, Sein und Zeit, p. 227. [한글본]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 306쪽.

[5] Heidegger, Sein und Zeit, p. 228. [한글본]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 306-307쪽.

[6]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IX.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옮김, 325쪽.

[7]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X.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 326쪽.

[8]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XII, corollary.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 328쪽.

[9]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XIII, note.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 328쪽.

[10]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XIV, note.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 329쪽.

[11]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XVI, proof.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 330쪽.

[12]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XVI, note.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 330쪽.

[13] Spinoza, Ethics, part V, prop. XL.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 333쪽.